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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음다움 Apr 22. 2024

내가 알던 네가 아냐!

유영이 본 것은 하나의 퍼즐 조각이었고 유진은 그저 퍼즐 그 자체였다.


  내가 알던 법칙 깨부수기 


  법칙.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성립된 모두와의 약속. 그래서 보편적인 상황에서 대체적으로 정해지는 그런 것. 포털에 검색하여 나오는 의미와 내가 생각하는 법칙의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공연을 보기 전에도 ‘실종법칙’, 이 연극의 의미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연극의 시놉시스를 읽다 보니 극에서 등장하지 않는 ‘유진’이라는 인물의 실종이 이야기의 시작임을 깨달았고, 그렇게 나는 민우의 자취방 속으로 몰래 숨어 관람을 시작했다. 


  (1) 장소 깨부수기 


  연극의 시작이 되는 장소 자체도 색달랐다. 연극 무대는 대부분 위로 솟아있거나, 평평하다. 그러나 <실종법칙>은 가운데가 움푹 파인 무대에서 배우들이 들어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대사를 퍼부었다. 마치 개미지옥처럼 인물들이 그 안에 들어가 다시는 밖에 나올 수 없을 것처럼. 


  관객들과의 소통이 주된 임무가 아닌 듯했다. 관객들과 양방향적인 소통을 하고, 더 나아가 의중을 묻는 연극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실종법칙>에서도 이 부분이 말 그대로 ‘실종’했다. 연극을 보는 것이 아닌 민우의 방에 피어난 하나의 곰팡이가 된 것처럼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생각은 할 수 있는 덩어리 정도로 존재하는 것이 나의 임무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관객과의 소통이었다. 시선이 분산되지 않았고, 연극 무대상 소품의 이동이 힘들었기에 눈이 피로하지 않았다. 민우와 유영의 표정 그리고 그들의 대사, 마지막으로 그들의 시시때때로 바뀌는 알리바이가 나를 몰입시켰다. 


  누가 죽였을까. 아님 누굴 죽였을까. 곰팡이가 하는 생각치곤 조금 섬뜩한 듯싶다. 


  (2) 플롯 깨부수기 


  클리셰라는 말이 있다. 기꺼이 추측하지 않아도, 예상이 되는 줄거리를 의미하는데 <실종법칙>에서는 위와 같은 정신적 노동이 불가했다. 민우와 유영을 처음 만나는 난, 그들의 성향과 성격 100% 분석하기엔 한참 모자랐다. 그래서 서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유영과 민우의 시선에 의지했다. 프로파일러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군가를 속일 만큼 철저하지도 않은 나에게 이번 의지는 철저히 계산된 연출자의 소구라고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않고도 다 알고 있다고 말해 버리는 우리, 실상은 누군가의 시선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는 중일수도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그 모든 것이 민우와 유영의 행동 그리고 그들에게 의지하고 있는 나의 볼품없는 통찰력에서 느껴졌다. 추리와 스릴러 장르가 이루고 싶어 하는 메시지는 주로 관객들의 끊임없는 추론과 의심일 것이다. 그러나 <실종법칙>에서 얻은 것은 클리셰를 부수는 자기 통찰이었다. 결말이 충격적이기보다 연극을 보고 나서 떠오른 나의 인사이트가 더 충격적인 연극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인사이트엔 클리셰가 존재할 수 없나 보다. 


  (3) 인물 깨부수기 


  유영과 유진 그리고 민우와 변리사. 눈으로, 말로 등장하는 인물을 이렇게 총 네 명이다. 특히 유진과 변리사. 유영과 민우의 말을 통해서만 관객은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유영과 민우의 말을 들어도 유진과 변리사를 판단하기엔 근거가 너무 부족했다. 서로가 제일 유진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유진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종된 여자 주인공과 남자친구가 아닌, 실종된 주인공의 언니와 전 남자친구의 이야기라니. 의도적으로 가깝지만 먼, 멀지만 가까운 인물들을 내 시야 안에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일지 한참 생각해 보게 하는 장치였다. 대다수의 개인적 갈등 상황에서는 한 사람이 상대방보다 객체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모호한 신뢰도를 바탕으로 연극이 끝날 때까지 등장인물에게 신뢰를 줄 수 없는 관객이 되어 버렸다. 이해하기 벅차 나 홀로 생각하길 멈출 때도 있었다.


  이렇게 심리적 거리가 먼 등장인물들을 배치함으로써 한층 더 섬뜩하고 스산한 <실종법칙>이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난 이 연극의 제목을 재배치함으로써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실종법칙>이 아니라 <법칙실종>, 내가 알고 있는 세 가지의 법칙이 사라졌다.


@ 원문 링크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9708

@ 아트 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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