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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음다움 Apr 25. 2024

매순간 다르게 쓰이는 소설 컬렉션

정답은 없지만 의미는 있는 싸움이었다.


  전시 소개


  마이아트뮤지엄은 [새벽부터 황혼까지 - 스웨덴국립미술관 컬렉션] 전시를 2024년 3월 21일부터 8월 25일까지 개최한다. 스웨덴-대한민국 수교 6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되는 이번 전시는 스웨덴국립미술관과 마이아트뮤지엄이 협업한 전시로서 스웨덴 국민 화가 칼 라르손을 포함하여 한나 파울리, 앤더스 소른, 칼 빌헬름손, 휴고 삼손, 외젠 얀손, 요한 프레드릭 크루텐, 브루노 릴리에포르스, 라우리츠 안데르센 링, 한스 프레드릭 구데 등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79점의 명작을 선보인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북유럽 국가에서 두드러진 예술 발전과 북유럽 특유의 화풍이 정립된 배경을 조명한다. 당대 젊은 스웨덴 예술가들은 역사화와 풍속화만을 고집하던 보수적인 예술계에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회화 실험과 전시 기회를 갈망하며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고국으로 귀향한 후 그들은 표현의 대상과 예술적 주제를 지역 모티프에서 찾는 등, 이국에서 체득한 화풍을 북유럽의 정경과 현실에 접목하였다. 


  오리 꿱꿱, 인간은 꺽꺽 

©Nationalmuseum Stockholm 


  무리를 지은 오리 떼들이 줄을 이어서 강을 건너고 있다. 하지만 왼쪽, 홀로 외로이 고개를 숙이며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는 오리도 있다. 이 작품의 이름은 <솜털 오리들>, 브루노 릴리에프로스의 작품이다. 원제를 살펴보면 이 그림의 이야기를 더 색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Elder Ducks’ 나이 든 오리들이라는 뜻이다. 솜털이 나고 활기를 띈 그리고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오리 떼들과 달리 나이 들고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오리는 다른 오리와 어울리지 못한다. 


  작가는 왜 오리들 사이에 소외감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대입했던 것일까. 우리는 왜 이 작품을 보며 오리에 감정이입하게 되는 것일까. 


  이번 마이아트 뮤지엄에서 열리는 전시인 <스웨덴국립미술관 컬렉션>에서는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작품과 같이 그 앞에 서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하는 촉진제 작품들이 많았다. 라우리츠 안데르센 링의 <아침식사 중에> 속에도 이야기를 꾸며낼 수 있는 소재들이 너무도 많다. 


  우선 오리 이야기를 먼저 마무리 지어볼까. 나는 보면 볼수록 한 인간의 인생을 한 폭의 캔버스에 모두 옮겨 담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젊은 시절이 있고 늙어간다. 특히 젊은 시절이 있기에 나이 든 시절이 볼품없게 느껴질 때가 많다. 흔히 말하는 상대적 개념. 애초에 사람들에게 젊음이라는 가치가 없다면 늙음이 이렇게까지 보잘것 없이 다가왔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오리도 젊고 푸릇푸릇한 모습이 바로 옆에서 보이니, 나이 든 오리가 더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것이다. 실은 이 오리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을 사는 오리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우리가 SNS를 활용하는 모습과도 많이 닮아있다. 나에게 있어서 행복의 기준을 찾지 않고, 남이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집에 사는 모습에 흔들리니 행복이 있다가도 사라진다. 행복의 기준을 바로 옆에서 찾지 말자! 외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부, 나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찾아야 함이 분명하다. 그리고 난 이 사실을 오리 몇 마리로부터 깨달았다. 


  표정을 볼 수 없는 이유

©Nationalmuseum Stockholm 


  <아침식사 중에>, 아침 식사를 하는 사람을 더 찾아보기가 힘들다. 아침 일찍 준비하여 등교를 하고 출근을 하고. 현대인에게 아침 식사란 주말에도 잠에게 밀리는 그런 하찮은 존재다. 그렇기에 이 그림이 더 눈이 갔던 건, 내가 잊고 있었던 아침 식사의 여유로움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만 봐도 느긋하게 이루어지는 아침 식사를 난 왜 이루어내지 못했을까. 이 그림 속 여인은 정치 기사를 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식탁 위에는 브런치가 놓여 있고 창문도 활짝 열려있다. 푸른색과 초록색으로 가득 찬 그림 속에서 그녀가 입은 빨강 꽃무늬의 베이지 원피스는 집에 잔잔히 펼쳐진 돗자리 같다. 


  하지만 유일하게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그녀의 표정. 단서는 많지만, 그 단서로 그녀의 얼굴을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다만 이 포인트가 흥미로웠다. 사람마다 분명히 다른 표정을 그녀에게 입힐 것이라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브런치에 손을 대지 않고 신문에만 빠져 기사를 읽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중얼거리는 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반면 전시를 같이 본 나의 친구는 그녀가 무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답은 없지만 의미는 있는 싸움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또 사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불러일으키는 소재들이 이번 전시를 관람하는 내내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조금이나마 내 상상력을 이 글에 추려보는 바이다.


@ 원문 링크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9738

@ 아트 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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