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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부상 Dec 22. 2020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제사 - 부여 자온당산제

"올 한해도 우리 규암마을 무탈하게 지내길 바라는 마음이죠"


자온당산제 준비로 분주한 부여 규암 수북정 풍경

매년 음력 1월 3일이 되면 규암면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온당산제’ 준비로 분주하다. 마을의 부녀회에서는 십시일반 음식을 장만하고 남자들은 제기 준비에 한창인 풍경을 볼 수 있다. 


여느 마을의 제사가 그렇듯, 규암리도 마을의 안녕과 풍족을 기원하는 모습이 사뭇 엄숙하면서도 울려퍼지는 풍장의 가락이 진취적인 감정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이 제사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기가 발견되면서 최소 고려말부터 시작됐으리라 예측할 뿐이다.


정월 초사흘이 되는 날,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면 온 마을에 세 번의 징소리가 울린다. 곧 산신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다. 징이 한번 울릴 때마다 그 신성함은 배가 되어 마을사람들은 의식의 경건함에 젖어 든다. 

자온당산제의 시작을 알리는 행렬 모습

이윽고 산신제 행렬을 맞이하는 의미로 마을의 몇몇 집 대문앞엔 횃불이 밝혀지는데 이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마치 머나먼 옛날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마을의 수호신을 환영하는 듯하다. 


음식 장만을 책임지는 아녀자를 ‘화주’라 일컫는데 제를 지내기 한달 전부터 마을 여성들 가운데 뽑게 된다. 제를 지내는 당일엔 화주 집 대문에 산신제 농기를 꽂아두고 풍물패들이 풍장을 울리고 복을 기원한다. 컴컴한 저녁, 겨울의 찬 공기를 마시며 마을공동체 모두가 한마음으로 너와 나의 안녕을 빌어 준다. 


화주로 뽑히게 되면 중요한 역할만큼이나 준비과정에도 엄격함이 묻어난다. 화주 집 대문에 농기가 걸리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한다는 뜻으로, 이내 금줄이 쳐지고 기도를 드린다. 몇십년 전엔 당일 새벽에 차디찬 백마강의 얼음을 깨고 목욕을 했는데 이 모든 의식은 부정함을 털어내기 위함이다. 현재는 간소화 됐다. 화주를 포함한 제관들은 제와 상관없는 사람에겐 일상의 불편함이나 육체적인 고통처럼 느껴지는 일련의 모든 과정들 속에서 오로지 ‘전통’이라는 이유로 명맥을 유지해왔다. 

제례가 한창 진행중인 수북정의 모습, 제례 정식 명칭은 규암 자온당산 산신제다.

당산제는 규암의 오래된 문화재 ‘수북정’에서 이뤄진다. 수북정은 백마강 자락의 한켠에서 위엄을 뽐내는 우람한 바위, 자온대에 자리한 팔각의 정자로 옛 백제 의자왕과 깊은 연이 있다. 


‘자온대’는 ‘스스로 따뜻해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터만 남아 말없이 존재를 알려주는 ‘왕흥사’를 가던 의자왕이 잠시 쉬기 위해 앉자, 저절로 따뜻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바로 앞, 백마강이 유유히 흘러서일까. 규암사람들은 예로부터 산신과 더불어 용왕신이 깃든 곳으로 여기기도 해 산신제를 지낼 땐 용왕신의 위패를 함께 모신다. 


‘자온당산제‘도 나름의 굴곡을 겪어왔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진 모르지만, 줄곧 이어져 오다 1970년도에 전국적으로 행해진 ’새마을운동‘ 미신타파의 영향으로 26년간 멈춤의 시간을 보냈다. 전생의 상흔을 뒤로하고 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을 이루던 그 시절, 부국의 영향은 곧 부여까지 전해졌다. 백마강에 다리가 놓이며 현재의 읍내는 발전했지만, 규암은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상점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떠났다. 그리곤 마을엔 교통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어린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를 당하자 사람들은 마을의 수호신이 노하셨다고 생각해 당산제의 부활을 외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96년. 자온당산제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체계로 다시금 부활했다. 26년간 외면받았던 마을의 민속제사는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자온당산산신제보존위원회‘를 조직하고 정성들여 제물과 제기를 준비했다. 이때부터 부여군이 전통계승의 차원에서 일부 지원하기 시작했다.

소지를 태우며 한 해의 안녕을 빈다.

2020년도 현재, ’자온당산제‘는 방문객들에게도 볼거리를 제공하며 명실상부 규암의 민속행사로 자리 잡았다. 거리굿이 요란하게 마을을 울리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단정히 의복을 갖춰 입은 제관들은 입에 한지를 문채, 아무말도 하지 않고 제기와 제물을 수북정으로 운반한다. 위패를 모시는 이는 더욱더 그 걸음이 숙연하다. 이들이 내딛는 땅 위로 복이 깃들길 바란다.

온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와 제례를 지내고, 백마강을 바라보며 마을의 염원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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