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봄날의 냉기가 가장 괴롭다. 창밖은 따사로운 햇살에 바람까지도 보드라운데 건물 안은 서늘하다.
어떤 조치라도 헤프게 여겨질 이 날씨는 속절없이 나의 말초신경을 눅눅하게 한다. 마치 냉장고에서 방금 막 꺼낸 며칠 묵은 음식처럼 냉기가 서려있다. 밖의 볕이 짙을수록 집은 음지가 된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다. 역시 이미 눌어붙은 한기에는 역부족이다. 눈을 감아보지만 더 이상 잠은 청할 수 없고 그렇다고 박차고 일어나고 싶지도 않아 몸을 둥글게 말아 안고 이불속 미약한 온기를 가만히 느껴본다.
온도체크의 시간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온 시간이 8할이다. 이 말은 열정처럼 둔갑되어 실체를 알아채기 어렵지만 사실은 오래 머물기엔 꽤나 숨 막히는 온도이다. 차가운 바닥을 데울 줄은 알아도 덥혀진 바닥을 식히는 법은 알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식힐 의지가 없었던 이의 겸연쩍은 고백이다.
평평하지 못한 바닥에 놓여진 가구처럼 어느 한 구석이 조금은 불편했다가도 바늘 한 칸 꽂아둘 여유조차 없어서 짐짓 그 불편을 미뤄두었었다. 어느 날 거의 모든 가구가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우두커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본질은 그저 뜨거운 가슴이다. 이미 뜨거워진 마음을 적정온도로 낮추기 위해서는 냉수에 담금질 정도는 해줘야 하는데, 매 순간을 그 담금질에 가까운 고통을 감수해 가며 살아가기란 스스로에게 할 짓이 못되었다. 이미 사랑해 버린 것을 애써 식힐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몇 가지 사랑하지 못한 채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문득 사랑에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인간의 에너지는 한정적이므로 뜨거운 가슴을 덜어내기 위해서는 나누기 작전이 시급하다는 판단이었다. 없는 땔감을 끌어다 쓸 수는 없으니 더 많은 것을 사랑하는 전략은 생각보다 매우 효과적일 것이었다. 다만 이 낯선 방식이 지난 삶을 배신이라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동의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덜 뜨거울 뿐, 이 온도가 적당한 온도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방식은 내게 느리게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리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것으로 이미 성공이었다. 외려 이전의 뜨거움보다 지금의 미약함이 세상을 데운다는 사실이 너무 위안이 되어서 무릎을 탁 쳤다. 눈물이 핑 돌았다. 확고부동하게 쐐기를 박아준 순간이었다.
느리게 그리고 오래 사랑하는 것.
이렇게 나는 게으르게 계절을 세기며 헤픈 인간이 되기로 한 결심을 떠올렸다.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 도도한 고양이가 품으로 폴짝 뛰어오른다. 역시 다 나쁜 건 없다. 고양이와 행복해지기 더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