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을 덮으며.

함께 산다는 것.

by 조수연
아주 작은 것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은 감기 기운으로 기력이 없는 데다 아이들을 위해 남아있는 한 방울까지 쥐어짜고 나니 정말 엥꼬가 나버려 손가락도 하나 까딱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누런 코를 도롱거리며 엄마에게 주렁주렁 매달리는 것으로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호소했다. 아아, 이 시간도 지나갈 거야, 아무리 되뇌어봐도 시계의 분침까지도 내 마음을 모르는지 좀체 엉덩이가 무겁다.


나도 이젠 지칠 대로 지쳐서 아주 사소한 것 하나에도 반응하고야 말겠다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이제 전투태세는 완벽히 갖춰졌다.


아이가 칭얼대며 보채는데 남편은 멀뚱히 서서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 듯 보였다. 요즘 바쁜 터라 아마도 일 생각을 하고 있겠지, 하며 이해해보려 했지만 내 인내심은 이미 바닥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남편의 별것 아닌 이 행동이 도화선이 되어 크게 언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나를 온전히 드러낸 사람과의 갈등은 내 부족한 면을 온전히 수용받지 못한다는 괴로운 미성숙함에서 시작된다. 타인에게는 그럴 수 있다며 쉽게 흘려보내던 일들도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람에게는 단 한치도 허용하지 않는 옹졸함을 여실히 드러내고야 만다.


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 때면, 바람에 날려 긴 여행길을 떠났지만 결국 뿌리내릴 곳 없는 건물 난간에 자리 잡은 민들레 홀씨 같다는 생각이 들어 처연하기까지 하다.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의 부족한 면을 끌어안기란 힘든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이 사람만큼은 나를 온전히 받아줄 것이라는 어쭙잖은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 헛된 희망이 결혼생활에 어느 정도 탄력을 주는 것이겠지, 하며 아무리 이해해보려 해도 내 지친 심신은 화를 놔주지 않는다. 결국 이성의 끈을 놓치고 말았다.


고성이 오갔다. 들고 있던 물건을 탁자에 세게 내려놓는다. 남편과 나는 철천지원수처럼 서로를 노려본다. 다툼 중에도 나의 다툼으로 말미암아 아이들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품에 안아 아이를 진정시킨다.


끓어오른 감정을 애써 추슬러야 하는 것은 내게 인고의 시간을 선사한다. 내게 주어진 어두움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눌러 담는 시간이다. 아이들은 낯선 풍경에 울고, 나는 현실과 심연을 번갈아 오가며 가쁘다.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데 뾰족한 파편이 이전의 상처를 헤집는다.


전쟁 중, 그 추슬러지지 않는 감정으로부터 생겨난 미움들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던 시절. 그저 이 상황이 두렵기만 하던 때, 내가 믿고 버틸 거라곤 언니의 작은 손뿐이었다. 그 어린아이가 더 어린아이를 위로하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꼴이란, 아이에게 너무 가혹하고 잔인한 장면을 여과 없이 노출시키는, 폭력 그 자체였다.


달려오는 차를 보며 피할 수 없던 순간, 질끈 눈을 감아보지만 차가 달려오고 있다는 것은 이미 청각을 통해서도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어떤 완충제 없이 오롯이 나의 온 존재를 타격해 온 사건들. 그 어린아이가 피할 곳이라고는 전쟁터 말고는 없었다는 것, 그것이 가장 아픈 장면으로 다가온다.


나는 군데군데 부어오른 상처의 흔적들이 생겨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생각한다. 아이들은 이런 흉터가 없으면 좋겠다. 이미 다투는 장면은 여과 없이 노출되었지만, 이 순간에도 조금이라도 완충제가 될 만한 것을 찾는 애처로움은 내 사랑의 다른 얼굴이다.


다툰 뒤의 적막은 작은 물소리도 숨죽이게 한다. 적막을 이불 삼아 덮으며 그래, 너도 일하랴 아이 돌보랴 아내 신경 쓰랴, 게다가 너도 많이 아팠었지, 생각한다. 그래도 서운함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손톱 밑의 가시는 하찮은 만큼 쉬이 빠지지 않기에 더 성가시니까.


다정함은 체력에서 온다고 했던가. 그 말을 떠올리자 먹어야 했다. 그게 온기를 회복하는 방법이었다. 음식을 준비한다. 고운 소리로 먹으라고 권하지 못하는 투박함으로 화해를 청한다. 병 주고 약 주는 모습은 엄마와 살짝 어긋난 듯 닿아있다. 그래도 괜찮다 그 1도 차이로 나는 같은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 어긋남으로 나는 고통으로 영영 닿지 않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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