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범람.
그래도 사랑.
나는 5월 달력만 봐도 숨이 턱 막힌다. 5월은 쉴 틈 없이 나에게 주변 챙기기를 종용한다. 달력마저 내게 인간이기를 바라는데, 나는 받아들이기가 만만찮다.
나는 세탁기를 보며 생각한다. 이 세탁기는 내게 아이들이 어릴 땐 건조기가 꼭 필요할 거라는 이유에서 건네진 사랑이었다. 실용적인 선물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너무 뜨거웠다. 그날도 그랬다. 그녀는 하필, 내게 세탁기와 함께 슬픔을 건넸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 시간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내게 사랑을 퍼부었다. 나는 익사할 것만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따로 있는데 자꾸만 주고 싶은 것을 주면서 호응을 강요했다. 잘 다듬어진 춤을 추는 듯이 보였지만, 그것은 그저 휘두르는 것에 불과했다.
이 감정이 뭔지도 몰랐던 시절엔, 그녀가 주고자 하는 걸 받지 않으면 너무 슬퍼할 것만 같아서 받아 들었다. 그럴 때면 마치 괴로움을 마신 것 같아 나는 꼭 소화제를 먹어야만 했다. 그 감정은 너무 여러 겹에 쌓여있어서 몇 겹을 들추어보아도 바닥을 보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눈치만 보다가 꿀꺽 삼켜버린 것이었다.
이제는 그게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랑이었는지 안다. 그러나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두려운 일이었다. 내 뿌리를 잘라내고도 나는 살아낼 수 있을까. 나아가서는 시선들을 감당할 수는 있는 걸까. 겨우 이 두 문장에 압도되어 나는 문제를 풀어보려는 시도 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너무 까마득하여 깊숙이 넣어두었던 것이다.
이미 그녀에게서 멀리 떠나왔음에도 그녀를 만나고 나면 여전히, 나는 넝마가 되어있다. 퍼부어대는 사랑을 제발 그만 멈추어 달라고 애원을 해도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녀를 만난 뒤 나에게 남는 것은 그 사랑의 흔적과, 번번이 실패한다는 패배감이다.
그 무력함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와 보려고 그녀를 향해 필사적으로 단호한 단어들을 입에 쉼 없이 담아보지만, 그녀에게는 어림도 없다. 놀랍게도, 발이라도 달린 듯 되돌아와 나에게 생채기를 낸다. 그럴 때면 그녀가 ‘그것 봐. 넝마 같은 인간이라는 걸 너는 인정해야 할 거야.’ 하며 나를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그녀는 타인의 감정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을 만큼, 자기 자신에게만 심취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슬픈 것은 그런 가학적인 사랑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신을 학대했던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5월이 되면 숱한 감정들이 피어올라 감당이 어렵다.
그 사랑의 흔적들을 볼 때면, 마치 어디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쓰라리다. 이 감정의 복합체를 만나면 나는 이내 슬퍼진다. 어쩐지 다시 그 시절로 나를 회귀시키는 것만 같아, 발에 끈이라도 묶인 새처럼 낙담하게 된다. 이 감정의 정체를 몰라서 어쩔 줄 몰라하던 시절, 5월이 다가오면 슬픔이 걸음마다 흔적을 남겼다.
나는 나를 돌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래서 돌봄을 받기 시작한 내 진짜 나이는 어쩌면 겨우 대여섯 살 남짓할 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제 내 감정을 책임질 줄 안다. 이제는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볼 줄도 안다. 게다가 잘 포장해 들고 가니, 더 이상 흐르지도 않는다. 다만 두고 가지도 못한다. 한 번 들게 된 이상, 계속해서 함께 가야 한다는 걸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함부로 떼어 냈다가는 사랑할 힘도 함께 잃는 불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슬픔에 겨워 포기하기엔 사랑은 너무 크다.
사랑은 내 세상이기 때문에.
슬픔에 셀 수 없이 찢겨 넝마가 되더라도 괜찮다. 나는 그래도 기꺼이 안아줄 거다. 넝마가 되어버린 나를 나 말고 누가 안아주랴. 나는 너덜너덜해져서 실오라기 한 올만 남는다 하더라도 값진 사람이다. 세상에 났던 고귀했던 그 처음의 모습을 기억한 채, 눈 꼭 감고 쓰다듬어 줄 거다. 그러다 보면 5월도 잘 지내질 거다.
그리고 언젠가는 더 커진 내가, 지나치게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슬픔을 안아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