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존재의 두강

<더시시비비-12>

by 리디아 MJ


9화. 내가 사라질수록 나다워진다


“존재는 채움보다 비움에서 완성된다.

나를 비워낼수록, 나는 더 나다워진다.”




세상은 끊임없이 말한다.

“너를 증명하라”고.

더 많은 이름,

더 많은 자격,

더 많은 존재감을 남기라고.


하지만

삶을 오래 붙잡고 살다 보니

나는 오히려

‘사라지는 일’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벤자민 버튼은

시간의 끝에서 태어나

사라지듯 젊어졌다.

그의 마지막은

증명의 순간이 아닌

소멸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사라짐은

패배가 아니었다.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자기를 완성하는 여정이었다.




나도 어느 순간부터

나를 지우는 법을 배워갔다.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

무언가를 감추려 하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존재하는 법을.


그건 비로소

진짜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되었다.




기억 속의 나는

언제나 존재를 증명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린 시절엔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

청춘엔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성인이 된 후에는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그런데 그때의 나는

진짜 ‘나’였을까?




나를 채우던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본질을 보기 시작했다.


화려한 수식도,

누군가의 평가도

내가 누군지는

끝내 말해주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난 뒤,

아무 말 없이 남은 침묵—

그것이 나였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내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 질문은

두렵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유로웠다.


소유가 아닌 존재,

가짐이 아닌 됨의 문제.




사라짐은 부정이 아니다.

가장 작고 투명한 존재일수록

빛을 가장 잘 투과한다.


가장 말이 없는 공간에서

가장 깊은 울림이 들리는 것처럼.




한밤중,

나는 조용히 글을 쓴다.

이 글은

나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비우는 행위다.


사라지는 글쓰기.

남기려는 게 아니라

흘려보내려는 쓰기.


이건 내 방식의 소멸이고,

동시에 내 방식의 탄생이다.




나는 이제

가벼운 사람이 되고 싶다.

존재를 주장하지 않아도

충분한 사람.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지 않아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


내가 사라질수록

더 선명해지는 나,

그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걷고 있다.



〈The CCBB-12〉 9화.

존재의 본질은 사라짐 속에서 드러난다.

비워낼수록, 나는 더 나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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