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려도 나는 나를 붙들었다.

7월 회고록

by 환히

흔들려도 나는

나를 붙들었다.


유산 이후, 꽤 오랫동안

나의 중심을 잃고 살았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몰입하지 못하고 흔들리며 살았다.

짜증, 피곤, 무기력함이 함께 했다.


하지만 나로서 살아가는 삶에 관심이 아주 아주 아주 많은 아이였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뭐지?

나는 누구지?

라는 질문을 늘 던지는..


나로 살아가고 싶은 열망은 마음 한구석에 늘 있었다.

그래서 7월, 바빴고 피곤했고 자주 흔들렸지만

그 속에서도 매일 몇 줄씩, 글을 쓰려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꼭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쓰고 싶었다.


그 글들은 결국,

나를 잃지 않기 위한 작은 애씀 있었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날의 나는 그냥 사라졌을 것이다.

‘오늘 뭐 했더라?’보다 ‘오늘 내가 어떤 마음이었지? ‘ 나는 오늘 어떤 것에 가장 크게 감정을 썼지?’를 물었다.




요가를 시작했다.

‘자유’ 로워지기 위해서.


한 달째하고 있는 요가는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요가를 하면서 드는 느낌은,

나를 조금씩 자유롭게 해주고 있다는 희미하지만 단단한 확신이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작은 움직임에도 담이 오고, 쉽게 아프고, 자꾸 굳는다.


몸이 굳으니, 마음도 감정도 함께 굳는 것 같다.

몰입하는 순간들도, 감탄하는 순간들도 줄어든다.


그래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알려준 태권체조를 쉬는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연습하는 아이들의 모습,

안되던 태권도 기술을 성공하고 난 후,

함께 기뻐하며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던 모습,


그런 모습을 이 참 좋다. 이런 순간들을 더 많이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


요가를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면?

지금은 굳은 몸이지만, 언젠가는 다시 자유로워지고, 마음도 더 말랑말랑해질 거라 믿는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을 가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눈빛은 나에게 언어다.


아이들을 대할 때도, 가장 많이 신경 쓰는 것이 눈빛이다.


7살 남자아이가,

유치원에서 물놀이를 다녀왔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사범님인 나를 보는 눈빛은 ‘궁금, 기대, 신남’으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심쿵했다. 정말…


반면 요즘 자꾸 눈빛에 힘이 없는 친구도 있다.

그 눈빛을 보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예전에는 어땠더라?’

‘어떻게 다시 빛이 돌아왔더라?’

기억을 더듬고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내가 이렇게 자꾸 아이들의 눈빛에 흔들리는 건,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마음을 주는 나의 사랑방식 때문이다.


이런 사랑 방식이 교육자로서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흔들리게도 한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결국 나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국부론’을 쓴 아담 스미스와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도

그 사사의 출발점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 글을 보았다.


마르크스는 ‘왜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는 항상 가난한가?’를 질문했고,

아담스미스는 ‘가난한 사람도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그래서 때론 힘들고 흔들 리만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사랑하는 일을

그 아이들의 눈빛을 바라보는 일을 멈추기 않기로 결심했다.


나에게 눈빛은

사람의 현재를 말해주는 언어다.

그 언어를 사랑하는 나는

사람의 현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기록은 나를 증명한다.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읽으며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살아 있었다.

감정을 견디고, 사소한 순간을 사랑하며,

흔들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살아냈다.




익숨함에 무뎌질 때,

감각을 살아나게 하는 방법


태권도 사범 일을 10년쯤.. 하다 보면

수업을 진행하는 방법은 몸에 완전히 배어 있다.

즉 긴장감 없이 ‘형식적인 수업’이 가능해진다.


겉으로 봤을 때는

열정적으로 손짓과 발짓을 하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내 정신은 멍해지고,

내 눈은 아이들을 보고 있지만 내 마음은 전혀 보고 있지 않을 때가 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샤워할 때 굳이 ‘이제 샴푸 해야지, 양치해야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집안 곳곳에 붙여둔 ‘좋은 글귀’들이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나치는 것처럼.


익숙해져 반복되다 보면

당연해지고, 무심해진다.


그리고 그 무심함과 피곤함을 깨기 위한 방법들 중,

내가 더 열심히 운동하는 방법이 있다.


‘내가 운동한다.’ 생각하며, 아이들과 함께 운동을 해버리는 거다.


누군가를 지도하는 데 있어,

좋은 지도법, 동기부여방법, 수업자료 등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본질은 지도하는 선생님의 에너지다.


별다른 말 없이,

함께 땀 흘리며 운동했을 뿐인데

내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사범님인 나처럼 팔과 다리에 힘을 주고 태권도에 집중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하루


태권도장 초등학교 1,2, 3학년 친구들과 물놀이를 다녀왔다.

10년 동안 매 년 여름, 다니고 있는 물놀이지만

이번 물놀이는 유난히

아이 하나하나가, 유난히 선명하게, 사랑스럽게, 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물총을 쏘면서 다이빙을 반복했다.

누군가는 햇볕 아래 친구랑 나란히 누워 있었다.

누군가는 혼자 물 밖으로 물속 사람들을 물총으로 쏘며 놀았고,

누군가는 미끄럼틀만 수십 번을 탔다.

또 어떤 아이는 2-3초 잠수하고 버둥대며 올라오기를 반복하다가, 신나게 달려와 내게 외쳤다. ”사범님!! 저 잠수 잘합니다.!! “


아이들마다 각자가 ‘그 아이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는 모습 자체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이번 물놀이는 ‘사람’으로서 아이들을 바라본 것 같다.

사범님, 책임자가 아니라 ‘그냥 나’로서.

그리고 그 눈으로 보니 아이들은 하나같이 다 빛나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지금 무언가를 정리하고 떠나려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떠나기 전에는 늘 익숙했던 장면조차 새롭고, 매일 보던 얼굴도 더 깊이 보이고, 당연했던 순간들이 특별해진다.




조급하고

외롭고

책임감에 눌리는 요즘


올해 연말, 함께 일하는 사범님 두 사람이 자신들만의 태권도장을 준비하러 떠난다.

나 역시 이곳을 떠나 서울로 가려한다.

그럼 부모님의 태권도장을 이어나갈 이는 아무도 없다.


5개월 남았다.

누군가는 준비해야 할 시간이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다.


그리고 오늘,

“그럼 우리는 뭐 먹고사나..”

엄마가 말했다.


그 말이 너무 숨 막혔다.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 10년 동안 함께한 우리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 등..

모든 무게가 나에게로 밀려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있다. 나를 위해서 부모님과 우리 태권도장 친구들을 위해서 이 공간을 좋게 마무리해야 한다.


그게 내가 몇 개월 동안 해야 할 일들이다.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며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는 것.




애씀과 여백 사이의 조율


피곤한 날에는 수첩에 그냥 한 문장만 끄적끄적 썼다.

여유가 있는 날에는 마음 깊이 있던 말을 꺼냈다.

글은 애씀이었고,

동시에 나를 위한 여백이었다.


어쩌면 내 인생에 큰 결정을 앞두고

나에게는 내 결정을 포기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고

나 스스로가 남 핑계 대며 도망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책임감이 필요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나의 생존본능이 글을 쓰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앞으로 몇 개월,

좀 더 유쾌하게, 좀 더 즐겁게

나의 길을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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