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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기행문 2

파리 초행자의 실시간 기록

by 꿀꿀아빠 Feb 08. 2025

2


둘째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시작하는 실질적인 첫날이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나가니, 너무 이른 탓에 아직 완전히 날이 개지 않은 파리 전경이 펼쳐진다. 멀찌감치 에펠탑과 몽마르트 언덕이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여느 도시와 다름없다.

오늘은 모든 것을 처음 겪게 될 것이다.


오전 7시, 보통의 파리지앵이 그러하듯 모닝빵 구매를 위해 나섰다. 꽤 쌀쌀하지만 감내할 만하다. 

거리는 그저 조용하다.

도보 5분 남짓 거리에 동네 빵집이 있다. 

주방을 제외한 공간이 10평 남짓의 크지 않은 식당임에도 종업원은 셋이나 있다. 빵 굽는 향이 매우 진하다.

여러 빵들이 진열되어 있는 와중에 빠른 선택으로 몇 가지 골랐다. 바게트와 몇몇 크로아상.

빵집 문을 나서면 바로 입에 넣을 요량으로 한입 크기의 작은 빵도 몇 개 더했다. 

빵집을 나오는 동시에 바로 빵을 맛보았다.

과연 다를까? 달랐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어떤 종류의 감칠맛까지 느껴졌다. 가장 다르게 느낀 부분은 빵 안에 공기가 깊게 스며들었다는 점. 한국의 빵과 같은 질량이라면 부피는 더 크다.

빵 결 사이사이 공기량에 의해 베어 물면 푸-숙하고 공기가 새어 나오고, 그 공기 안에 은근한 빵냄새가 묻어 나오며 더 부드럽고 풍미 있게 느껴진다. 조리법의 차이인지 재료의 차이인지, 또 다른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귀국 후로 미뤄두고 그냥 빵을 즐겼다.


빵을 들고 이모집으로 돌아갔다. 빵은 전체 아침식사의 일부일 뿐이다. 집에서는 이미 야채샐러드와 계란후라이, 햄이 정갈하게 놓인 넓은 접시가 준비되어 있었다. 접시 옆에는 포장된 형태의 두 종류의 버터가 있다. 빵을 소분하여 추가하니 어엿한 프랑스 가정집의 아침식사다. 

유럽의 감성에 서서히 취해가는 것 같다.

커피 향까지 더하니 쭉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이모와 마주 앉아 오늘 계획을 체크했다. 

이곳으로부터 300km 떨어진 벨기에를 당일치기로 다녀온다. 우리로 치면 서울에서 대구를 자동차 타고 당일치기하는 셈이다. 대륙의 셈법에 다시 한번 놀라며, 이렇게 느긋하게 아침 먹고 있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구 당일치기면 새벽같이 일어나 출발했어야 될 것 같은데, 파리지앵인 이모는 그다지 서두르지 않는다. 

'아침 다 먹고 정리한 후에 9시 30분에 출발하자' 

그러기로 했다. 이모와 만난 직후, 공들여 준비한 여행계획에 수정이 가해지는 순간부터 전문가의 말을 전적으로 따르기로 마음먹었었다.


이제 출발이다. 이미 이모는 한 짐 챙겨서 나왔다. 과일, 주먹밥, 보온병에 담긴 커피 등. 언제 다 준비했지?

이모는 네비도 찍지 않고 고속도로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이제사 시차적응이 조금 된 나는 바깥을 둘러보고 별다른 특이점이 있는지를 찾기 시작했다. 

도로에서의 특이점은 자동차이다. 세계화가 이미 충분히 진행된 현시점에 못 보던 외제차가 지나다닌다든가 하는 건 없다. 다 한 번씩 본 차량들이다. 다만 여러 브랜드의 차종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현대, 기아차가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독삼사 등의 외제차가 좀 섞이는 분포인데 반하여, 이곳은 자국 브랜드인 시트로엥, 르노를 비롯하여 현대, 기아, 독삼사 , 피아트, 폭스바겐, 도요타, 렉서스 등의 외제차들이 고르게 섞인 모양새다. (물론 일부 하이엔드 브랜드의 차들이 희귀하게 보이는 건 동일하다.)

마치 쿼터제라도 있는 것 마냥 고른 분포는, 타인의 영향을 덜 받는 프랑스 국민들의 심성과 유럽대륙의 물류 유통 프로세스와, 그 안을 잘 파고든 한국과 일본의 적절한 마케팅 전략이 뒤섞인 결과로 보인다. 


차량의 외관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은 번호판에 국가가 표시되어 있다는 것(프랑스차는 F, 벨기에 차는 B라고 적혀있다.) 외에 한 가지가 더 있다. 

앞유리 썬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전 세계와 한국의 다른 점으로 말하는 것이 적합하겠다. 앞유리 썬팅 제한은 운전자의 시야 확보나 테러 등 위협에 안전확보를 위해 행해진다고 한다. 납득할 만한 사유이다. 한국이 유독 관대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한국은 서구권 국가에 비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일부 양보하는 것에 익숙한 정서인데, 선팅 문제에서 만큼은 개인의 사생활이 크게 보호된다. 


생각을 멈추고 다시 달리는 차량으로 돌아가서 보니 목적지까지 약 3시간이 걸린다.

300km에 3시간이니 평균 시속 100km이다. 운전을 해본 사람이라면 '평균'속도 100km가 얼마나 빠른지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다들 벨기에로 나들이 가느라 차가 막히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있었다. 

그런데 가만 돌이켜보니 산술적으로 시내를 벗어나면 막히기는 어렵겠다 싶다. 파리 인구가 약 200만 명이라고 하니 서울의 1/5이고, 주말에 움직일 가능성과, 주요 관광지가 파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고르게 분포돼 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아무래도 교통 체증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파리시내는 항상 교통체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3시간은 꽤나 먼 여정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이 역시 기우였다. 이모는 프랑스 역사 유튜버에 빙의하여 혁명 이후부터 2차 대전이 끝나는 150여 년의 역사를 브리핑한 후, 미술사까지 영역을 넓혔다. 나도 파리 방문 전 어느 정도 공부한 만큼 적절한 추임새를 겸한 아는 척을 할 수 있었지만 내가 모르는 디테일도 많았다.

특히 미술 영역에서 책으로 공부한 것과 실제 그림을 보고 느낀 사람 간의 간극이 꽤나 있었다. 

알레고리 해석 등은 내가 읽은 것이나 이모가 들은 것이나 동일한 내용일 것이나, 그림의 크기설명, 입수경위, 그림이 걸린 위치 등 큐레이팅 대한 지식은 훨씬 방대해서 미술관 방문 전 좋은 교육이 되었다.


그러던 중 벨기에 국경을 넘었다. 

국경이 원래 이렇게 자동차로 툭 넘는 것인가?

서울에서 구리 넘어갈 때 보다도 감흥이 적다. 그래도 구리 넘어갈 때는 '여기서부터 구리시입니다. 반갑습니다' 정도의 표지판이 반기지 않았었나? 벨기에어를 읽지 못하니 환영 인사가 있었는지 불확실하다. EU깃발 아래 벨기에라고 쓰여있는 표지판을 본 것이 전부다.


국경을 넘어도 한참을 가야만 첫 번째 목적지인 브리헤에 다다른다. 옆 차량들의 번호판은 어느새 다 B로 바뀌어 있다. 양 옆으로는 계속 목축업이다. 소와 말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전원의 일상이 평화롭다. 한국의 고속도로 옆 시골마을 풍경과 내용 상의 차이는 크게 없다. 다만 좀 더 광활하고, 집 모양이 다르고, 소와 말이 자유로워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낸다.


목적지를 조금 앞두고 휴게소에 들렀다. 

화장실을 가기 위함이다. 여기서 말로만 듣던 돈 내는 화장실을 처음 경험해 보았다. 

0.8유로를 내야 한다. 우리 돈 약 1,200원

안 내고 들어갈 도리는 없다. 돈을 받는 화장실이라 그런지 깨끗하다. 들어갈 때는 그냥 신기한 문화구나..했는데, 약 십여 초 만에 소변을 보고 나오는 길이 되니 0.8유로가 아깝다. 주변에 2시간 동안 보고 달렸던 것이 풀밭인데. 이게 맞나? 아니면 더 큰 일이라도 치르고 나와야 하나.

당장은 그럴 의지가 없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게이트를 밀고 나왔다. 


차는 조금 더 달려 드디어 브리헤에 도착했다.

북해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운하가 있는 도시다. 내리자마자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9시 반에 출발하여 3시간 걸려 도착했으니 딱 점심시간이다.

테라스에 앉아 식사를 하는 수많은 유럽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마다 평화롭다. 돌바닥은 윤형이 유모차를 밀고 다니기에 최적의 환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다닐 정도는 아니다. 자전거 대여가 활성화되어 있는지 자전거 타는 사람도 많다. 


메인골목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서니 돌바닥길 양 옆으로 폭 10미터쯤? 높이는 2-3층의 작은 고딕양식 건물들이 쭉 늘어선 형태이다. 

유럽 하면 떠오르는 그 건물들이다. 건축학적인 희소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냥 중세 이후 일반 가정집으로 쓰였을 법하다. 그런 평범한 건물들 앞에서 카메라를 꺼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뭐 때문에 이리 매력적일까.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 때문일까. 한옥을 보고 그런 기분이 크게 안 드는 걸 보면. 낯섦이 더해져서 인가.

혹은 그 자체로 미학적인 것이어서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인가. 

건물의 높이를 흔들림 없이 지탱하는 돌벽이 주는 안정감 때문에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일 수 있겠다. 이후 보게 될 왕궁, 시청과 같은 거대 건축물도 이 기초 양식을 확대한 형태일 것이다. 좌우지간 이 건물들의 나열은 상상 속에 있던 유럽의 이미지를 거의 비슷하게 구현해내고 있었다.

건물 내부에 기념품점, 와플가게, 명품편집샵 등. 관광객 특화 상점들이 운영 중인 것은 나의 상상과 미세한 차이가 있었으나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쭉 따라 걷다 보니, 이번에는 큰 건물이 보인다. 성당이다. 이곳은 또 다른 의미로 눈이 돌아간다. 이런 건물을 짓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왜 요즘은 저렇게 짓지 않는 지도 궁금할 정도로 웅장하고 듬직하고 경건하다. 

벨기에에 관해서는 진즉에 공부를 하지 않고 방문하게 된지라, 이 큰 건물이 어떻게 여기에 있고, 무엇을 하는 곳인지, 뭐 때문에 유명한지 전혀 모른다. 그냥 건물의 미학적인 가치만을 느끼려 할 뿐이다. 그래서 더 낫다. 이제 유럽을 처음 느끼는 나로서는 그저 멋진 석조 건물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신기하고 만족스럽다.


사진 찍고, 걷고, 감탄하다 보니 이제 좀 출출하다. 점심시간이 약간 지날 무렵이 되니 꽉 들어찼던 테라스 좌석에 빈자리가 속속 보인다. 예수님의 피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는 성혈성당 옆 식당에 자리 잡았다. 물론 테라스석이다. 화장실을 들르기 위해 식당 내부에 잠시 들어갔는데 내부에는 테라스 좌석의 2배가 넘는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단 한 팀의 손님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 자체가 테라스석의 분위기를 위한 인테리어용으로 보이기도 한다. 


주문은 전문가인 이모가 리드하고 우리는 큰 가이드라인만 제시했다. 

아주 오랜 시간 후에야 메뉴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금방금방 나온다. 샐러드와 홍합요리, 와플, 그리고 맥주 3종이었다. 다른 음식들은 여행 내내 차차 먹어본 후에 평하기로 하고 지금은 맥주에 관해서만 먼저 말하고자 한다. 독일 못지않게 맥주로 유명한 벨기에 역시 그 탁월함이 어디 비할 곳이 없었다. 맛과 향도 일품이지만 가장 다르게 느낀 건 그 부드러움이다. 혀를 넘어 목구멍에 닿기까지 맥주라는 액체가 이리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물질인 것을 처음 알았다. 마치 기름이라도 몇 방울 넣은 듯 미끄덩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그 넘김이 술의 맛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한국에서는 늘 소주만 마셨고 그 목적이 취하기 위함이었다. 맥주는 유사시에만 찾는 것이었는데, 맥주가 이렇다면야 매일도 먹을 것 같다. 3종의 맥주 샘플러는 식사 내내 훌륭한 동반이 되었다.


테라스석의 장점이라기보다는 이곳 유럽의 장점은 흡연에 대하여 거의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지극히 흡연자의 관점이다.

특히나 흡연에 관해서 만큼은 여느 독재국가를 방불케 하는 한국 국적의 관광객이라면 그 무제한의 자유를 여실히 실감할 것이다. 애초에 흡연구역이라는 개념 자체가 따로 없이 어디든 흡연이 가능하고, 옆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도 별다른 면죄부를 부여받지 못한다.(애초에 유모차를 밀며 담배를 태우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풍경이다.)

한국이었으면 독재에 동참했을 이들이 유일하게 숨을 수 있는 곳은 지붕 아래뿐이다. 반대로 지붕이 없는 모든 곳에서의 흡연(길을 걸으면서든 가만히 서있든 무관)은 그저 일상이다. 그리고 비흡연자도 그에 대해 불쾌감 자체를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쯤 되면 흡연에 대한 불쾌감 역시 일종의 후천적 학습 결과로 보는 것이 맞겠다. 


다음 일정이 남았다. 브리헤로 부터 100km가량 떨어진 벨기에의 수도 브리셀.

평균 시속 100km는 유지되어 차로는 딱 1시간 거리이다.

도착하니 이미 저녁녘이다.

브리셀은 수도답게 브리헤보다 좀 더 크고, 넓다. 그랑플라스라는 대형광장에 진입하자 별천지다.

앞서 브리헤의 큰 건물들도 웅장하다 생각되었는데 브리셀 그랑플라스에 서있는 지금 돌이켜보니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도시였다. 그 웅장함 와중에도 세밀함.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랑플라스를 둘러싼 4개의 거대 석조건물은 각각의 기둥에 세밀한 조각상을 품고 있다. 이걸 어떻게 했지..라는 생각뿐이다. 놀랍고 무섭다.

누가 이걸 기획했으며, 어떤 의도였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걸 실현했을까. 기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런 놀라운 모습을 선사하는 이 건물들이 그 당시는 어떤 포지션이었을까 등 그 방대함과 세밀함, 기술력에 감탄을 금지 못하겠다.

앞서 본 오줌싸개 동상이 생각보다 매우 작아 귀엽다고 생각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대형 석조건물들에 압도되었다.


현실에서는 그 건물들이 당연하다는 듯, 광장에서 노래하고 공연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토요일 저녁이라 일주일 중 가장 붐비는 시간대라고 한다. 다양한 인종이 제 각각의 복장으로 모여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 전지구적인 문제에 대한 생각도 떠오른다.

돌아오는 길에 무료로 거품비누를 제공하는 유료화장실을 한 번 더 들른 후 내내 자면서 복귀했다. 


사실상의 여행 첫날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느껴 한편으로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앞으로 또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되겠지만 이 첫날 느낌 새로움에 정도를 더하고 빼는 것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내일부터 펼쳐질 메인챕터 파리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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