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초행자의 실시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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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설렘으로 늦게 자기도 했고.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엄마가 깨워줘서 그제야 일어났다. 전날 밤 먹은 치킨 탓에 만두는 차에서 토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 별다른 변수 없이 잘 흘러가 알맞은 시간에 잘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하이 프동 공항을 경유하는 시간을 포함하여 총 16시간의 이동 일정이다. 메인은 경유 이후의 12시간 비행인데 나름 선방이다. 선방의 결정적 이유는 3-4-3 좌석 구조의 우측 3을 우리가 전용으로 사용하다보니 옆 사람 눈치 안보고 해당 공간을 전용할 수 있다는 것.
가장 큰 변수였던 윤형이가 비행을 잘 해냈다.
좁지만 전용하는 공간이다 보니 윤형이는 좌로 누웠다가 우로 누웠다가 앉아서 좀 놀다가 자다가.
윤형이 입장에서는 비즈니스석 이상의 비행 환경이었을 것이다. 어른들도 옆좌석으로 다리를 뻗는 등 다른 손님보다 다소의 이점은 있었던 덕분에 비행은 순조로웠다.
순항한 비행기는 샤를드골공항에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다. 파리시간으로 저녁 6시30분경. 착륙 직전 창문으로 물이 보이길래, '파리는 비행기 도착하면 외부 물청소하는구나..' 싶었는데 소나기가 잠깐 내린 것이었다. 출발 전 파리 날씨에 대해 여기저기서 고지받았다. 만두 의견으로는 엄청 춥다더라, 현지인인 이모 내용으로는 가디건 걸칠 날씨다 였다. 나시만 입은 상태로 여기까지 도착하여 내심 걱정을 담은 채 비행기에서 내렸으나, 위에 뭐 하나 더 걸칠 필요는 없어보였다.
느긋한 성미의 드골공항 직원들로 인해 꽉 막혀 줄이 늘어선 출국심사장을 상상하며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그러나 출국심사도 뚝딱. 대기줄이 없었다고 봐도 된다. 일반 승객도 앞의 수 팀 정도만 대기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윤형이 유모차를 대동한 우리는 그마저도 불필요했다. 프랑스 출국심사관의 업무처리 속도와 응대도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모는 우리의 도착카톡을 받고 그제사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짐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그런가 딱 맞게 공항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직 실감이 안 난다. 공항 여기 저기에 프랑스어로 된 광고판과 각종 안내문이 있어도 공항과 주변 풍경은 여느 국가와 비슷하여 그런지, 이모차를 타고 오는 내내 바깥 풍경을 봤음에도 아직은 얼떨떨하다.
공항에서 파리 12구에 위치한 이모집까지 이동 하는 길에는 '파리'라고하면 떠올리게 되는 그런 고풍스러운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은 아주 많다. 우리로 치면 재건축을 앞두고 있는(또는 필요해 보이는) 아파트와 같은 연식의 건물들이다. 여기도 그냥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었다. 이모는 '저 멀리 뾰족한게 에펠탑이야' 하고 알려주었는데 멀어서 별 감흥은 없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긴 하다.
드골공항에서 이모집까지는 차로 약 3~40분 걸린 것 같다. 그 간 안부 등의 근황 수발신은 맨 처음 두어 마디 정도로 다 정리되었고, 이동 중 주요 대화주제는 향후 8~9일간 펼쳐질 여행에 대한 질의응답이었다.
이모는 바쁜 와중에도 앞단 이틀 시간을 빼두어 우리와 함께 하기로 하였다. 사전에 계획표에 반영해두었다.
첫 이틀 간의 계획은 이러하다. 우선 첫째날은 벨기에를 간다. 이는 몇 가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 중에 고른 것이다.(다른 선택지로는 지베르니, 몽생미셀, 디즈니랜드 등이 있었다.) 유럽에 발 담글 일이 인생에 몇 차례나 될지 모르지마는, 이왕 방문했을 때 한 나라라도 더 봐둬야 이득이겠다 싶은 생각이다. 사실 선택지가 주어지기 전에는 벨기에를 간다는 발상을 떠올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무리 EU라도 옆 나라를 그리 하루만에 뚝딱 다녀올 수 있다는 자체가 아직 어색하다. 사실상 섬나라 국민이다 보니 대륙의 사고방식에 적응하려면 시일이 걸릴 듯 하다.
좌우지간 파리여행 첫 여행지가 이웃나라인 벨기에다.
진짜 파리는 둘째날부터다.
둘째날은 이모차를 타고 파리의 명소를 찍는 원데이 코스다.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괜찮은 생각이다. 일종의 여행 목차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목차를 훑고 나서 재미있어 보이는 챕터는 열심히 들여다 보고, 그렇지 않은 챕터는 제목만 읽는 정도로 하고 스킵해도 무방할 것이다. 효율성 측면에서 괜찮다.
다만, 여행준비기간에 공들여 짠 계획표는 대폭 수정이 불가피해보인다. 좋게 생각하면 일정에 여유가 좀 더 생긴달까.
계획표는 주어진 시간에 어떤 장소를 끼워넣는 방식으로 되어있다. 나는 이 계획이 꽤나 빡빡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모와의 인터뷰를 통해 꽤 널널하단 것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오랑주리 미술관 및 근처 구경 일정을 반나절 잡아뒀는데, 2시간이면 충분하다든가하는 식이다.
원계획 상의 여유 시간 확보에 더하여, 목차를 훑고 나서 스킵할 장소도 있을 것이고, 이모의 말에 의하면 밤에 돌아다녀도 위험하지않다고 한다.(계획에선 파리의 치안문제를 우려하여, 저녁 8시 이후 일정은 잡아두지 않았다.) 이런 조건들이 더해지면 시간적으로 꽤나 한적하게 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행토크를 하는 사이 이모집 도착이다. 13층짜리 복도식 아파트 건물이다. 단지입구로 들어설 찰나에는 정말로 여기가 서울 도봉구인지, 파리 12구인지 가늠이 어렵다. 지하주차장이 요즘 흑인 청년들의 놀이터가 되었다는 최신 근황을 들으며 이모집이 위치한 12층으로 올라갔다.
사촌동생 재원이가 반겨주었다. 재원이는 예나 지금이나 그냥 똑같은 모습이다. 살이 찌거나 빠지거나 체형이 변하지도 않고, 나이가 들지도 않은 것 같다.
집이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 집이 매우 협소할 것이란 선입견이 있었다. 나름 근거있는 선입견이었다. 미리 방문했던 친척들의 증언이 그러했고, 그에 더해 파리의 크기가 서울의 1/6정도로 작고, 그에 비해 너무 많은 관광객으로 인한 비싼 부동산 가격,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마치 홍콩의 주택처럼, 현지인은 좁은 집에 꽉꽉 눌러 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꽤나 널찍한 집을 보고 기존의 내 추론에 여러 착오가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한국의 여느 가정처럼 정돈된 느낌은 아니다.
가구 배치며, 전등의 모양 및 방식, 각종 살림살이가 한국식의 규격화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모집에 도착해서야 '아 유럽에 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뭔가 정돈되지 않은 듯한 자유로운 모습이 멋져보인다. 일종의 문화사대주의일까.
이모가 준비해준 만찬에서 역시 같은 느낌을 받았다. 스테이크와 샐러드, 치즈는 전날 점심으로 먹었던 추어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방은 이모가 쓰던 방인데, 에펠탑도 보인다. 이제는 어둑해진 시간. 에펠탑이 불을 뿜고 있었다. 멀긴 하지만 명확하게 에펠탑이 보인다. 멋지다. 하지만 실감은 안 난다. 아직은 시차적응 중이다. 진짜 파리에 대한 감상은 내일 모레 목차를 보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