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라는 이름으로.
3시간이 지났다.
어두웠던 극장 안이 환해졌고,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꼴깍, 소리가 날까,
숨조차 조심히 쉬고 있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상영 전에는
'세 시간을 어떻게 버티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영화는 첫 장면부터
그 걱정을 무력화시켰다.
가부키라는 소재는 분명 생소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가부키는
설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예술이란 화려한 포장지 안에 싸여
관객을 인간의 욕망 쪽으로 밀어 넣는 장치에 가깝다.
한국에는 '서편제'
중국에는 '패왕별희'
일본에는 '국보'처럼 말이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역할과 피를 함께 부여받는다.
누군가의 딸, 아들, 언니, 동생.
역할은 이름보다 빠르게 우리를 설명한다.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동안
사회는 우리를 인정해 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유를 얻기보다 역할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한다.
영화 <국보>를 보며
나는 계속 같은 질문에 붙잡혀 있었다.
가문의 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짜 배우'가 되고 싶다 말하는 슌스케.
재능과 노력은 충분하지만
야쿠자의 피를 가진 외부인 키쿠오.
피와 재능,
서로의 결핍을 탐하지만 결국 가질 수 없는 것들.
축복이었어야 할 것들이
어느 순간 저주로 변해버린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가부키를 놓지 않는다.
그건 직업이기 이전에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누가 더 진짜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열어 둔다.
진짜 배우란 무엇인가.
진짜 예술이란 무엇인가.
세상에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짜'라는 말은
확신의 언어가 아니라
의심의 환경에서 등장한다.
출신이 있을 때,
배경이 없을 때,
구조가 공정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갑자기 묻기 시작한다.
이건 진짜인가, 가짜인가.
아마도 세상에 진짜 직업은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이유가 독이 될지, 빛이 될지,
혹은 둘 다가 될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이건 내 선택이었다'라고
끝까지 말할 수 있다면,
그 태도만은
진짜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진짜란
타이틀이 아니라
끝까지 남아 있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