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지 않기로 한 날의 쇼핑리스트

“잊기 위해 고른 사소한 것들”

by 박나킨
그날은… 그냥 지나가기로 했던 날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감정을 정리하는 대신 냉장고를 정리했고,

비어있는 게 마음인지, 장바구니인지 모르지만 채워 넣었다.


필요한 건 우유였지만, 손에 쥔 건 붉은 파프리카와

갑자기 눈에 띈 할인 중인 키치 한 운동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하루를

물건이라는 말 없는 조각들로 나눠 담았다.


그런데 마트에서 쇼핑리스트를 꺼내 적기 시작했을 때

이상한 물건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 우유
- 손톱깎이
- 방금 전 울고 나서 입 닦았던 휴지
- 네가 사주었던 저가 와인
- 칫솔 (하나는 너 거였지)
-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반투명 지퍼백
- 오늘은 아무 말도 안 하기로 한 기억


아무리 지우려 해도
나는 그날을
쇼핑 목록처럼 끌고 다니고 있었다.


결제는 했고,

기억은 하지 않기로 했고,
그날도 어김없이 포인트가 적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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