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도 행복할 수 있나요?

by 바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늙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늙음을 혐오하는 인간이 과연 삶을 긍정할 수 있을까요?

저속노화 식단, 흑발 염색, 피부 리프팅까지. 젊음조차 소유하고 연장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이번 글은 젊음을 찬미하고 늙음을 감추려 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노인 혐오와는 조금 다릅니다. 사람들은 노인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관심이 없을 뿐입니다.


한국만큼 흰머리 보기 어려운 나라가 또 있을까요.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은 일흔의 노인도 머리는 새까맣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외모 관리가 아닙니다. 늙음은 드러내면 안 되는 결함이 되었고, 젊음은 미의 기준을 넘어 일종의 생존 조건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불과 수십 년 만에 농업 사회에서 디지털 사회로 급격히 이동했습니다. 기술 변화는 세대 간 간극을 크게 벌려놓았고, 노인은 더 이상 지혜로운 사람이라기보다 변화의 속도에서 밀려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늙는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경쟁에서 뒤처지는 일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늙음을 숨기고, 젊음을 연명하듯 소비합니다. 이제 오래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젊은 상태로 오래 살아남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하지만 늙음을 혐오하는 사회는 결국 자신이 도달할 미래를 부정하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그 사회는 자연스러운 시간을 거부하고, 변화를 실패처럼 다룹니다. 그러나 누구도 젊음을 영원히 가질 수 없고, 누구도 늙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늙음을 밀어내는 사회는 타인의 현재를 외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미래까지 지워버립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늙음을 더 깊이 이해하는 일입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와 소외된 감정, 침묵된 존재에 대해 더 정직하게 응답하는 일 말입니다. 그 출발은 서사일 것입니다. 노인을 돌봄이나 연민의 대상으로만 그리는 미디어는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듭니다. 노인의 얼굴을 한 ‘인간’의 이야기를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더 존엄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흑백요리사의 후덕죽 셰프님, 선재스님의 이야기 처럼 말이죠.


정치와 정책도 늙음을 단지 복지의 대상으로만 다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의 후반부이자, 존재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삶의 후반이 단절이 아니라 확장이 될 수 있도록, 공공의 언어와 제도도 그 흐름을 품어야 합니다.


늙음의 자리를 지운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미래를 잃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늙음을 감추는 사회가 아니라,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회를 상상해야 합니다. 늙어도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은, 결국 삶 전체를 긍정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