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 점차 죽음으로 수렴해갑니다.
죽기까지 평균에 기대어 80년이나 남았습니다!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내가 살아있음을 정당화해줄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세계는 너무나 거대하고, 내가 없어져도 미동도 없이 존재할 것만 같이 굳건합니다. 내 삶의 가치는 내가 죽었을때 장례식장을 채운 사람수로 결정되는 걸까요? 왜 우리는 태어나서 여기 존재하는 걸까요? 이 어처구니없도록 허무한 인생에, 뭔가 의미라도 있어야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요, 사실 삶에 의미가 존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내 삶이 왜 계속되어야 하는지를 납득하지 못하면 삶의 무게를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의미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맞는 말이긴 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직접 만들고 유지하려면 그만한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럴 자원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시대의 문제는 삶의 의미가 사라졌다는 게 아니라, 의미를 개인이 전부 만들어내야 한다는 요구가 너무 커졌다는 데 있습니다.
과거에는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그 짐을 대신 져줬습니다. 선과 악의 세계관도, 이야기도, 공동체도 세트로 딸려 왔습니다. 그냥 더 큰 서사 안에 속해 있는 것만으로도 내 역할과 삶의 의미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전쟁과 디지털 혁명을 거쳐 그 거대한 이야기들이 힘을 잃으면서, 우리는 저마다의 작은 이야기 안에 고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연결이 끊기면 고통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힘든 건 내 탓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새로운 절대 진리일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대신 서로 다른 작은 이야기를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의미가 개인의 책임으로만 남지 않으려면,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연결하는 공감의 서사가 사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는 전쟁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연재해로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연대하고 그들이 겪는 책임을 덜어줄 수 있습니다.
아마 인간은 혼자서는 끝내 자기 삶을 완전히 떠받치기 어려운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의미는 완전히 개인적인 결심으로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또 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는 감각 속에서 비로소 버틸 만한 것이 됩니다. 의미는 거창한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계와 완전히 끊어져 있지 않다는 감각에서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삶은 분명 고통스럽습니다. 그 사실을 외면하면 지나치게 낭만적인 이야기만 남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삶의 결함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쉽게 얻은 것보다 힘들게 얻은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깁니다. 사랑도, 성장도, 책임도 대개는 고통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무게를 갖습니다. 그러니 고통은 단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삶의 의미가 생겨나는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게 될 것이고, 세계는 내가 사라진 뒤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굴러갈 것입니다. 그러니 삶은 처음부터 거창한 우주적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주 속 작은 존재인 인간은 사랑하고, 책임지고,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기 몫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밀어보려 합니다. 아마 의미란 바로 거기서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삶의 의미는 단지 나를 다시 내일로 데려갈 이유 만큼이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