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종교가 있냐고 묻는다면, 종교가 있다고 답하겠다.
신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답하겠다.
신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라고 답하겠다.
그럼 무엇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신을 믿는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안다고 말하겠다.
나는 종교와 신의 본질이 결국 믿음과 구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신을 말해왔지만, 그 말들 속에 들어 있던 것은 초월적 존재 자체라기보다 인간의 결핍과 불안,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갈망이었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의미를 원하고, 불안 앞에서 질서를 원하며, 자기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순간 앞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이유를 원한다. 그래서 어쩌면 인간은 신을 발견했다기보다, 고통에서 구원받기 위해 신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른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만들었다는 가정은 종교를 가볍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인간이 그만큼 연약하고 절실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교는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기 전에, 삶을 버티게 하는 구조였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신이 언제나 인간의 언어와 이야기, 경전과 해석을 통해 전해져 왔다는 점도 그래서 중요하다. 인간이 접하는 신은 처음부터 순수한 초월이라기보다, 인간의 필요와 상징과 시대를 통과하며 계속 다시 쓰인 신에 가깝다.
그래서 내게 중요한 것은 신이 실제로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을 믿는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하느냐이다. 인간의 삶에서 구원은 대부분 인간 사이에서 일어난다. 절망하는 사람을 붙잡는 것도 인간이고, 무너지는 사람 곁에 남는 것도 인간이며, 타인을 위해 자기 안위를 포기하는 것도 인간이다. 신앙은 때때로 그런 인간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자기 삶보다 더 큰 이유를 주고,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타인을 위해 행동하게 만들고, 끝내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정신이 된다. 신은 직접 손을 내밀지 않을지 몰라도, 신을 믿는 인간은 실제로 손을 내민다.
나 역시 그런 방식으로 구원받았다. 내 삶을 구원한 것은 신 자체가 아니라, 신을 믿는 인간의 태도와 행동이었다. 그 과정을 지나며 나는 신을 단순히 존재 여부로만 판단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됐다. 적어도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선의와 책임, 타인을 끝내 포기하지 않게 하는 마음 안에는 분명 어떤 형태의 신이 깃들어 있었다. 신은 증명되는 대상이라기보다, 인간을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바로 그 의미에서, 신을 믿는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내게 종교는 인간이 서로를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만드는 믿음의 형식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했던 인간이 신을 창조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신이 완전히 허무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 해도, 인간을 끝내 인간 이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본질은 신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끝내 서로를 살려야 한다는 인간의 오래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행동으로 바꾸는 정신에 있다. 내가 믿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