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들을 용서했나요?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질렀고,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면 그냥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특히 살인이나 아동학대, 성폭력 같은 범죄 앞에서는 이런 생각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형량이 터무니없이 낮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분노합니다.
문제는 현대의 사법제도가 이 감정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법은 중립과 원칙을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변호인의 역량과 자본의 크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불신이 끊이지 않습니다. 피해자는 오랫동안 고통 속에 남아 있는데, 가해자의 반성문과 치료, 교정과 인권은 훨씬 더 제도적인 언어로 보호받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게다가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가기 어려운 현실까지 생각하면, 지금의 시스템은 정의롭게 벌하는 데에도, 다시 위험하지 않게 만드는 데에도 모두 충분히 성공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형벌 제도를 복수의 기계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국가는 분노를 이해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무한정 집행할 권리까지 가져서는 안 됩니다. 처벌은 응보만이 아니라 예방, 교정, 사회의 안전까지 함께 고려하며 설계됩니다. 그래서 범죄자가 풀려나는 이유는 그가 용서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애초에 영원히 벌할 권력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의 처벌은 자주 너무 짧고, 어떤 악은 인간의 유한한 시간 안에서 도저히 다 갚아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지옥이라는 개념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범죄 앞에서 인간이 원하는 것은 판결문이 아니라, 도덕적 균형이 회복되었다는 감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응보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형벌은 쉽게 무한해집니다. 만약 인간의 수명이 늘어났을때, 20살 때의 범죄로 감옥에 살고있는 400살의 무기수는 정당한가요? 애초에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교정일까요, 아니면 충분히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일일까요. 법이 복수와 완전히 같아지는 순간, 정의는 잔혹함을 합리화하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국가는 스스로를 제한해야 합니다. 범죄 역시 단순하지 않습니다. 범죄는 개인 책임의 문제이지만, 동시에 환경과 구조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사실이 범죄를 면책해주지는 않지만, 범죄자를 순수한 악의 화신으로만 보면 감정은 정리돼도 해결책은 사라집니다. 어떤 범죄는 장기 격리가 필요하고, 어떤 범죄는 재범 위험을 낮추는 방식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무조건 평생 가두자는 말과 다 바뀔 수 있다는 말 사이에서, 위험과 책임을 더 정밀하게 구분하는 일입니다.
결국 “누가 그들을 용서했나요?” 아무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법은 용서를 선언하지 않습니다. 범죄자가 풀려나는 이유는 그가 용서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 국가가 범죄자를 영원히 벌하는 권력이 아니라 법의 한계 안에서 벌하고, 위험을 관리하고, 가능한 경우 다시 사회로 돌려보내는 권력으로 스스로를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그 제한은 불편합니다. 피해자에게는 지나치게 약해 보이고, 국가권력의 경계를 생각하면 반드시 필요합니다. 형벌은 그 불편한 긴장 위에 서 있습니다. 너무 약하면 정의가 무너지고, 너무 강하면 법은 복수로 변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분노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분노가 법의 이름으로 끝없이 증식하지 못하게 막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