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어른은 오늘도 한 발자국 성장했다
2020.02.03
사무실 책상에 앉아 감정 없이 타자를 두드린다. 타닥타다닥. 감사할 것 없는 무미건조한 내용에 감사하다는 끝인사를 습관적으로 붙여 메일을 보낸다. 회의시간엔 부장의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네네, 네 알겠습니다.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한다. 할 일 리스트에 잡무가 하나 더 추가됐다.
블라인드에 가려 희미한 창밖으로 해가 검붉게 번진다. 해야 할 일은 다 끝냈는데, 부족한 느낌이다. 내 월급만큼 일하려면 사실 점심 먹고 바로 퇴근해도 무방한데, 담당 업무 그 이상을 해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늘 나를 따라다닌다. 맡은 일은 모두 끝냈지만, 생각을 잔뜩 짊어진 채로 무겁게 퇴근한다. 언제까지 이 곳에 몸 담을지, 계속 반복되는 일과 중에 과연 성장은 있는지… 그렇게 해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 문제들을 생각하며 건물을 나선다.
하루를 회색빛으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회사 앞 회 맛집에 들러 모둠회 4인분을 포장했다. 집에 전화해 회를 포장해 간다고 말하곤 지하철로 40분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 아빠는 회를 사 온다는 소식에 이미 막걸리를 한 통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다. 회를 고추냉이 푼 쌈장에 찍고, 묵은지에 싸서 입에 넣으면 행복감이 온몸으로 퍼진다. 엄마 한 입, 아빠 한 입, 동생 한 입 회가 쏙쏙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아, 이 맛에 돈 버는구나.’ 우리네 아버지들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릴 적 따끈한 통닭 양손에 들고 집에 들어와 큰 소리로 나와 내 동생 이름을 부르던 아빠의 마음과 같은 것일까? 그때의 아빠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어떤 것들을 버텨냈을까 생각하게 된다. 어른답게 회색 하루의 끝을 달콤하게 바꿔 마무리 지었다는 뿌듯함. 그리고 아빠의 발자국 위에 내 발을 포개며 느끼는 뭔지 모를 안도감까지. 나 진짜 어른이 다 됐구나. 이렇게 29살 어른은 오늘도 한 발자국 더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