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오래 감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온전한 휴식이다. 가만히 앉아 다른 감각들은 잠시 쉬게 하고 오로지 폭넓고 풍성한 음정을 귀로 들여와 간질간질 들어오는 음표들을 음미했다.
나의 일상은 주로 아침에 일어나 다시 잠들기 전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으로 정리된다. 일어나자마자 휴대전화로 날씨 확인, 출근길 버스 안에서는 릴스 보기, 사무실에서는 모니터, 퇴근 후에는 드라마든 책이든 뭐든 쏟아지는 콘텐츠를 눈으로 쉴 새 없이 받아들인다.
그런 일상에서 만난 오랜만의 클래식 공연은 단비 같은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피아노 시인이라 불리는 쇼팽과 지브리의 만남이라니.
쇼팽과 지브리 음악 모두 어릴 적부터 좋아하고 자주 들어 익숙한 데다 집중해서 듣다 보면 몽환적인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다른 시대와 다른 장르의 음악이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
공연장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는 괜히 들뜨는 마음을 붙들었다. 설레는 마음이 갑작스레 찾아온 따뜻한 봄바람 때문인지 좋아하는 공연에서 비롯된 건지 헷갈렸다.
공연 홀 앞에 도착하자, 관객들은 다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령대도 다양했다.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어린아이들을 비롯해 젊은 남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부부까지. 자녀, 친구, 부부 등 함께 온 동반인 조합도 폭 넓었다.
관객의 폭넓은 연령대를 예측한 듯 피아니스트는 공연에 앞서 선보일 곡들을 재미있게 풀어 설명했다.
‘강약약’이라는 전 연령대 통합 용어로 3/4박자 곡 쇼팽의 왈츠 7번 올림 다단조 64-2와 마녀배달부 키키의 ‘바다가 보이는 마을’을 소개하기도 했다. 덕분에 공연의 잘게 쪼개지는 리듬과 박자를 놓치지 않고 맛있게 즐길 수 있었다.
아티스트나 곡에 대한 사전 조사 없이도 충분히 공연에 몰입할 수 있도록 설명-공연 구성이 잘 짜여있다. 중간중간 피아노를 통한 맛보기 예시도 감칠맛 나게 잘 들어가 있다.
매 공연이 시작될 때마다 상냥한 안내는 계속됐다. 덕분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인생의 회전목마‘ 편곡 버전이 어떤 과정으로 우리 앞에 오게 되었는지 깨알 같고 재밌는 히스토리까지 알게 됐다.
잔잔하게 시작한 공연은 2부, 막을 향해 달려갈수록 더욱 빠르고 화려해졌다. 절정을 향해 달려가며 떠다니는 음표들 또한 풍성해져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쏟아져 내리는 음과 표의 흐름에 집중해야 한다.
친숙한 음악을 스피커가 아닌 악기에서 직통으로 내리꽂히는 음악에는 기대보다 더 강한 울림이 있다.
앙상블. 2인 이상이 하는 연주라는 단어면서 동시에 프랑스어로 조화•어울림을 뜻하는 명사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는 각기 뚜렷한 소리를 내면서도 그 화음이 아름답게 퍼져 마치 파스텔톤 수채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화음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는 소름까지 돋았다.
피아니스트부터 바이올리니스트까지 모든 음악가가 음악에 몸을 푹 담고 있는 모습도 인상 깊었다. 시작과 멈춤, 쉼, 끌고 당김, 강조. 음악의 모든 요소가 그들의 에너지로도 잘 나타났다. 마치 연주하는 게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보여주기식 공연이 아닌 음악을 100% 소화해 대중들에게 흘려보내 주는 것 같았다.
부드러우면서 동시에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이 음악들은 끝에 벅찬 여운이 남는다. 그 찌르르한 감동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집에 오는 길, 눈을 감고 공연을 회상했다. 포장지보다 알맹이가 더 아름다운 선물을 열어본 느낌이다. 올해 최고의 봄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