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

창조와 파괴

by 이연

어김없이 올해 여름도 장마가 시작되었다. 숨 막히는 더위와 습기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리는 날의 산책은 내게 각별하다. 인적이 드문 거리와 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흐릿한 공기. 대지로 무수히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만큼이나 불규칙하고 맥락 없는 생각들이 자유롭게 우산 속을 떠다닌다. 생각에 잠기기 위해선 일정 이상의 비어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럴 때 세상의 소음을 덮는 거친 빗소리와 우산이 제공하는 타인과의 거리감은 확실히 도움이 된다.


오래도록 내리는 비는 세상을 한층 짙고 뚜렷하게 만든다. 강렬한 태양 아래 당당하게 피어 있던 꽃들은 소나기에 목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가끔은 어느 나무에서 떨어졌는지 모를 열매가 터져 짓무른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편 비에 흠뻑 젖은 풀들은 생명을 되찾은 것처럼 싱싱하고 푸르게 보인다. 어떤 것은 남고,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시작한다. 생성과 소멸이 이렇게나 가까이 등을 맞대고 있는 모습을 나는 산책 중에 곧잘 발견하곤 한다.


내게 일어난 불행도 어쩌면 비슷한 본질을 갖추고 있다. 삶으로 끌어당기는 힘과 죽음의 추동이 일평생 내게 번갈아 가며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처럼. 나는 그 불길한 본성으로부터 무언가를 찾아보려 헛되이 노력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조차도 필연의 일부였다. 다만 모든 걸 ‘내 스스로’ 선택했다는 거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은 세계가 원자들이 충돌하며 일어나는 운동으로 형성되는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가 한 인간의 내면에 비슷한 방식으로 적용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탄생과 멸망은 끝없이 이어지고 공존한다. 우주에서도, 우리 내부에서도.


세계 위에 세계가 언제까지나 돌고 있네.
창조에서 파괴로,
강물 위 물거품처럼
반짝이다 꺼지며 흘러 내려가네.

―퍼시 비시 셸리의 시


그런데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가? 물웅덩이를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는 길 위에서 나는 모든 걸 인정하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충격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더 큰 세계와의 충돌로 파괴되는 세계. 나는 오늘도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진다. 이를 소화하기 위해선 불필요한 상념 대신 자연스러운 힘에 이끌리는 것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휩쓸어 가는 소용돌이야말로 영혼이 진정으로 가야 할 길이고, 운명을 견디는 방법이다. 악착같이 인생을 걸어온 결과 눈앞에 놓인 게 멸망뿐임을 발견하더라도 슬퍼할 필요는 없다. 주어진 시간을 다해 빛 속으로 녹아 사라지건, 무언가로 다시 소생하건 간에 우리는 순환 속에서 그저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므로.


곧 비는 그치고 익숙한 계절이 돌아온다. 가끔 나는 이 모든 걸 지루해하지만,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한 순간 또다시 불가사의한 힘이 덮쳐오리라는 사실을 안다. 우리가 결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당연한 질서에 의하여.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내 삶이 그 파도에 기꺼이 삼켜지길 바란다. 그리고 때가 되면 내 거추장스러운 자아는 완전히 분해되어 저 흐름 속에 남김없이 흡수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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