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에 잠든 아이

#1

by 이연
은빛 남루한 풀잎이 정신없이 헝클어져
시냇물이 노래하는 초록의 한 구덩이
거만한 산 위로 태양이 비치는,
빛의 거품이 이는 작은 골짜기.

맨머리에, 입을 벌린 어린 군인 하나
푸르고 신선한 물냉이 속에 목덜미를 담근 채 자고 있네
풀 속에, 구름 아래 누워
빛이 쏟아지는 푸른 침대 위 창백한 모습으로.

글라디올러스에 발을 담그고, 그는 자고 있네
아픈 아이처럼 미소지으며, 잠들어 있네
자연은 그를 따뜻하게 흔들지만, 그는 추위에 떨고 있네.

향긋한 향기들도 그의 코를 스치지 못하고
햇살 아래, 그는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잠들었네
오른쪽 가슴에 두 개의 붉은 구멍이 난 채.

―아르튀르 랭보, 《골짜기에 잠든 이》


I는 바다가 가까운 시골 마을에서 자란 아이였다. 그가 사는 집 뒤편에는 작은 산이 하나 있었고, 거기로 난 외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무성한 나무 틈새로 높은 언덕이 보였다. 길은 점점 좁고 험해지지만, 포기하지 않고 싱싱하게 자란 풀들을 헤치고 끝까지 올라가면 그 아래엔 아주 작은 계곡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마치 누구도 밟은 적 없는 미지의 땅을 찾아낸 것처럼 기뻐했던 그 날의 경험이 아직 생생히 기억난다. 무엇보다 그 신비한 장소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물이 흐르는 길을 따라 태양을 듬뿍 받아 무성히 자라난 갈대 무리와 그 위로 잎사귀를 드리운 작은 수양버들 한 그루였다.


어릴 적 산과 바다를 가리지 않고 함께 뛰어놀던 I와 내가 찾아낸 비밀 장소를 보고 우리 둘의 부모님은 그 나무에 끈을 매달아 그네를 만들어 주었다. 나보다도 조금 더 어렸던 I에게 그 장소는 보물이었다. 특히나 I는 나무에 달린 그네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했다. 아마도 그네를 타기 위해선 누군가 함께 산을 올라 아이의 등을 밀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어린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I는 하루가 다르게 자랐고, 오래지 않아 그는 혼자서도 충분히 산을 타고 그네를 밀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조부모님 댁에서 방학을 보내던 그 마을은 어린아이가 귀했다. I의 가족은 유난히 몸이 약한 자식의 요양을 위해 연고가 있던 동네로 이사 온 특별한 경우였다. 그 나이의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당시 어른들은 내게 거의 비슷해 보였으므로 잘 묘사할 순 없지만, I의 부모님은 타인에게 친절하면서도 본인 자식에겐 다소 엄격한 부류였다. 아마도 아프기 쉬운 외동딸을 돌보는 데 있어 무조건적인 애정보다는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두 분은 좋은 보호자였으나 제3자인 내가 보기에도 조금은 무뚝뚝한 구석이 있었다. 심지어 I는 건강 탓에 학교조차 다니지 않았으므로 또래 친구를 무척 갖고 싶어했고, 언제나 우정에 목말라 있었다.


부모님의 소개로 우리가 만났을 적의 I는 나이에 비해 훨씬 어려 보였다. 길고 얇은 원피스를 입은 마른 체구의 소녀는 처음엔 수줍어했으나 나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못했고, 이야기에 장단을 맞춰 주자 금세 마음을 열고 재잘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떨어져 지루해 하고 있던 나에게 I는 반가운 존재였으므로 우리는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함께 있던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시간에 비해 많은 것을 공유하고 서로 나누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가 지나고 마을로 돌아올 때마다 도시 생활에 젖은 티를 내며 달라진 스스로에게 우쭐해하던 나와 달리 I는 아주 오래도록, 조금씩 성장해가는 신체에도 불구하고 나와 처음 만났던 시절의 모습을 간직한 것처럼 그대로였다.


그러던 중 부모님의 사정으로 인해 조부모님 댁에서 방학을 보내던 우리 집의 연례행사는 1년 가량 없던 일이 되고 말았고, 나와 아이의 만남 또한 무산되고 말았다. 처음엔 곧잘 편지를 주고받았으나 그것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이기적인 천진함으로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금세 잊어버렸고, 다시 I를 만나기 전에야 대수롭지 않게 올해는 갈 수 있을 거라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하지만 I에겐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마을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의 일이었다.


태양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뜨겁고, 매미가 귀 아프도록 울던 한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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