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짜기에 잠든 아이

#2

by 이연

내가 다급히 I의 집을 찾아갔을 때 문을 열어 준 것은 그의 어머니였다.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미리 전해 들었던 나는 초조한 마음을 숨긴 채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분은 초췌해진 안색으로 땀에 젖은 내게 물을 한 컵 내주시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여름이 시작될 즈음부터 I의 상태는 이미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고 했다. I의 건강을 위해 이 벽촌까지 이사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아이는 어릴 적 심하게 앓은 경험이 있었고, 작건 크건 병치례가 잦았다. 내게도 I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밖에 나가지 않고 함께 방 안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었다. 언제나 I의 뒤를 따라다니던 병약함은 결국 이 가족을 여기로 이끌었고, 건강에는 제법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모순적이게도 아이에겐 외로움이라는 또 다른 병을 만들어 냈다. 점차 말수가 줄어들고 감정표현이 없어져 가는 자식의 모습을 I의 부모님은 그저 단순히 사춘기에 접어들 때가 되어 찾아온 변화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병의 징조가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기록적인 무더위를 경신했던 바로 지난 주였다. 전날 유난히 피곤해하며 기운이 없던 I가 아침이 되어도 도무지 나오질 않기에(아이의 방은 안방과 조금 떨어진 2층 구석자리에 있었다) 문을 두드렸지만 방은 잠겨 있었고,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급히 열쇠로 문을 열자 잔뜩 식은땀에 젖어 바닥에 쓰러진 I를 발견한 일을 아주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내게 털어놓으셨다. 하필 주말이라 시내의 병원도 문을 열지 않아 근처에 사는 의사에게 연락한 뒤 방을 뒤져보니 집의 구급약 상자에서 몰래 가져간 듯한 진통제가 남김없이 비워진 상태로 몇 통이나 발견되었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아이의 어머니는 더 일찍 이변을 알아차리지 못한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하고 계셨다. 그러나 재앙이라는 것은 본디 그토록이나 교묘하고 비열한 성질을 지닌 것이다. 평화를 가장한 냉혹한 고요함을 온몸에 두르고, 발자국 소리조차 없이 마치 악마가 그림자 속에 숨어 우리의 뒤를 바싹 쫓아오듯이 이 가족을 집어삼키고 만 것이다.


근처에 사는 의사 부부 중 한 명이 급한 연락을 받고 달려와 주었지만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고, 그가 말하기를 소녀의 병이 단순한 열병처럼 보이기도 하나 혹시 모르니 서둘러 큰 병원에 데려가기를 강력히 권했다고 했다. 하지만 I가 한사코 자신의 방에서 떠나기를 거부하며 억지로 끌어내려 하면 거의 발작을 일으키는 탓에 주말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러지 못했다고 아주머니는 설명하셨다. I의 어머니는 그의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내가 그의 마음을 돌려주기를 기대하고 계셨다. 간밤에 아이는 심한 고열과 오한, 두통에 시달리며 몇 번이고 누군가의 이름 비슷한 것을 부르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고 말씀하셨다. 여기까지 들은 나는 어린 마음에도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고 무척 혼란스러워졌다.


어서 빨리 I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던 나는 이어지는 "헛소리"에 관한 얘기를 성의 있게 듣지 않았으므로, 아무래도 내 조급함이 티가 났던 모양이었다. 오래지 않아 나는 I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내가 들어갔을 때 아이는 자고 있었다.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방 한편, 커다란 창문 옆에 놓인 침대 위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나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I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신체적으로는 훌쩍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유난히 움푹 꺼진 뺨과, 어깨 위로 늘 단정하게 빗어 내리던 갈색 머리카락이 베개에 눌려 엉망으로 헝클어져 얼굴과 목에 달라붙은 모습이 아이가 오래 누워 지낸 시간을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병이 I에게서 기력은 빼앗았을지언정 부드럽게 감긴 눈꺼풀과 꾹 다문 입매의 아름다움마저 앗아가진 못했다. 내가 몰라보게 달라진 친구를 알아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소녀의 앳된 얼굴과 성격에서 우러나온 차분함은 병이 만들어 낸 새하얀 뺨과 연보랏빛 입술로 장식되어 한층 안타깝게 빛났다. 아마도 소녀가 가진 모든 것이 순수라는 이름 하에 정돈되어 아픔조차도 하나로 끌어안는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당시 나는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충격과 슬픔에 압도되어 몰라보게 달라진 I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든 그의 얼굴 위로 우리가 함께 산과 바다로 뛰어놀던 추억과 사진처럼 남은 기억 속 생기 있게 반짝이던 I의 모습이 아른거리자 모든 게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만나지 못한 고작 1년, 그 짧은 시간 안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I와 내게 주어진 시간의 속도가 같지 않음을 몰랐던 나는 마음속 의문을 삼키며 차오르는 슬픔에 의자에 앉아 한참이나 소리를 죽여 울었다. 내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후 I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이가 깨어난 것을 뒤늦게 발견한 나는 황급히 눈물을 닦고 친구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소녀는 나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가냘픈 미소를 지으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와 줬구나."

"응. I. 오랜만이야. 몸은 어때. 괜찮아?"

"네가 올 줄 알고 있었어."


내 질문에는 대답을 않고 엉뚱하게 그리 말하는 환자에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가 올 거라고 알려줬거든. 참새와 도라지꽃이 말이야.” I가 말했다. 소녀는 늘 감탄이 나올 만큼 풍부한 상상력으로 빚어낸 자신만의 언어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곤 했다. 나는 뺨에 흐른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병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여전한 친구의 모습은 내게 조금이나마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아이를 도와 그가 편히 베개에 몸을 기댈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뼈가 고스란히 만져질 만큼 수척해진 어깨가 안쓰러워 또다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나는 I의 얼굴을 보았다. 아픈 어린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한 눈동자로 그는 내 쪽이 아닌 침대 옆 유리창 한가운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저기, 저 나무 보여? 내 그네가 있는 나무야. 내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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