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렇게 말하며 I는 핏줄이 비치는 마른 손을 들어 망설임 없이 창문 밖 한 지점을 똑바로 가리켰다. 그의 방 창문에선 뒷산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우거진 나무와 수풀이 뿜어내는 녹음 사이로 우리가 매일같이 오르내리던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들꽃의 색까지 아주 선명히 살필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언덕 너머에 위치한 예의 그 비밀 장소가 여기서 보일 리 없었다. 나는 친구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그의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을 눈으로 좇는 척했다. 어쩌면 지극히 맑은 농도로 세상을 비춰내는 소녀의 눈엔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본인을 맞아주던 특별한 버드나무가 정말 보이는지도 몰랐다. 최소한 그렇게 여기는 게 마음 편했다. 내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그럼. 보여. 네가 좋아하는 곳이잖아. 매일 혼자서도 몇 번이고 올라가던…."라고 대꾸하자 I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만 시선은 여전히 “나무”를 향해 있었다.
"기억해 줬구나."
물론 기억하지,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아이는 내 말을 잘랐다. "하지만 이제 혼자가 아냐. 저기 내 친구가 있어." 그리고 당황한 내게 의문을 표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몸이 더워서, 너무 뜨거워서… 울고 있는데 갑자기 이마가 차가워져서 눈을 들어보니 그 애가 있는 거야. 있지, 걔 손은 정말 차가워서 이마에 닿는 순간 천장에서 얼음이 떨어진 줄 알았어. 그래도 시원했어. 고맙다고 얘기했는데 웃기만 하고 대답을 안 하더라. 정말 말이 없는 성격인가 봐. 답례로 뭐라도 주고 싶었는데 자꾸만 그 애가 가기 전에 잠이 들어 버려서… 그래도 너무 아플 때마다 꼭 와서 도와주곤 했어. 내가 깨어 있을 때는 조금이라도 말을 했는데… 걘 저기에서 왔대. 내 그네를 맘대로 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길래, 괜찮다고 했어. 너도 나한테 말 안 하고 탄 적 많잖아, 그렇지? 우린 친구니까 얼마든지 그래도 되는 거잖아… 그래도 다음에는 같이 타자고 했어. 나랑 같이. 그런데 내가 갈 때마다 어쩐지 걔는 자고 있어서 말이야. 어떻게 해가 그렇게 뜨거운데 한 번 뒤척이지도 않을까? 한 번 자면 정말 깊게 잠드나 봐. 꼭 너랑도 닮았지. 너도 늦잠을 자서 내가 깨우러 갈 때면 신경질 부리곤 했잖아…. 그래서 실컷 자라고 내버려 두고 깨우진 않았어. 그냥 옆에서, 걔가 누워 있는 물가 옆에서 뛰어도 보고 노래도 부르고… 결국 그네는 혼자 탔지만 그래도 친구가 옆에 있으니 즐거웠어. 그 애와는 말을 하지 않아도 편해. 여기 있든 저기 있든… 우린 언제나 같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 너도 함께 하면 좋을 텐데. 우리 셋이서… 저기서, 너랑 했던 것처럼 숨바꼭질도 하고 토끼풀로 꽃반지도 만들면서 즐겁게 노는 거야. 쭉 그러고 싶었는데 네가 없어서, 너도 알지만 난 손재주가 없잖아. 알려주기는커녕 망치기만 할걸. 그런데 이제는 네가 왔으니 할 수 있겠다. 그치. 우리 다 같이, 셋이…."
고열과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심한 두통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느렸고, 종종 꺼질 듯 사그라들기도 했지만 끈질기게 이어졌다. 다행히 큰 높낮이 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독특한 어조에 익숙한 나는 어렵지 않게 친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던 ‘이상한’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전해 듣기로 I는 아프기 한참 전부터 혼자 외출한 적이 없었다. 하물며 근 몇 주간은 혼자 산을 올라갈 만한 몸 상태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명랑하고 활달한 친구라면 늦은 밤 부모님 몰래 집을 빠져나가 놀고 왔다거나 하는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그랬다면 지금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조금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I가 열에 들떠 헛것을 보았거나,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내용이었다. 아이가 그려낸 풍경과 "친구"에 대한 묘사는 단순한 환상으로 치부하기에 구체적이고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었다. 병이라는 것이 비단 육체만이 아닌 너무나 투명해 물들기 쉬운 그의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심장에 드리운 기묘한 그늘을 느끼며 나는 어떻게든 그 "꿈"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었으나, 내 얄팍한 호기심보다도 중요한 문제―한시바삐 친구를 이 방에서 끌어내 큰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래. 가자. 네 몸이 나으면, 다시 건강해지면 얼마든지 예전처럼 놀러 갈 수 있잖아. I. 내일은 시내의 큰 병원에 가야 해. 물론 지금 가장 힘든 건 너겠지만, 날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 줘. 그러니까 우리 약속하자. 응? 병이 나으면 얼마든지 그네든 뭐든 타러 갈 수 있으니까. 꼭 같이 가겠다고 약속할게."
나는 이불 위에 놓인 I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환자의 손은 땀에 젖어 있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차가워 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이는 그제야 하염없이 저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던 것을 멈추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눈을 마주친 순간 I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흐릿해진 탓에, 소녀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미미한 존재감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I의 몸에 의해 창문이 반쯤 가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육신 위로 풍경이 투영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그건 얇은 커튼으로는 한낮의 태양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의 속삭이듯 내게 말했다. "응. 그럴게. 그러자."
다음 날 I는 죽고 말았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옷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아침 일찍 친구의 집으로 달려온 나에게 의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지난밤 갑작스럽게 찾아온 심장발작을 시작으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더는 손쓸 방도가 없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어른들은 마지막 인사를 전하라며 망연자실한 나를 I의 곁으로 이끌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오만한 태양 아래, 가슴 위에 손을 얹고 고요하게 눈을 감은 친구를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저기”에서 왔다는 I의 새로운 벗은 그가 어떤 본능적인 직감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그려 낸 스스로의 초상임을.
I의 몸은 하얀 천에 덮여 그 위로 부모님의 눈물을 적시고 있었지만, 나는 아이가 더 이상 여기에 없다는 걸 알았다. 소녀는 사랑해 마지않던 버드나무 아래 마련된 자기만의 푸른 침상에 누워 신선한 물속에 목덜미를 담근 채 아주 긴 잠에 빠졌으리라. 차갑게 식은 그 육신을 자연이 따뜻하게 보듬어, 발치에 가득 핀 글라디올러스의 향기조차 그를 깨우지 못하리라. 수풀 속에, 구름 아래, 골짜기 안에 누운 그 아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