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
중고등학교 시절 산 좋고 물 맑다는 북한산 밑 우이동에서 살았다. 소귀를 닮아 '우이[牛耳]'라고 이름 붙여진 우이동은 서울에서도 은근히 산골짜기 느낌이 나는 동네였다. 지금은 우이신설선이 생겨서 우이동에서도 바로 지하철이 이용가능하지만, 그때는 서울 어디라도 나가려면 버스를 타고 수유역까지 가는 방법이 제일 빨랐다. 버스 종점들도 많았다. 지금은 번호들이 바뀌었지만, 6번, 6-1번, 8번, 8-1번, 28번 등등. 우이동 종점에서 출발하는 버스들은 수유동, 쌍문동을 지나며 매 정거장마다 사람들을 태웠다. 계속해서 타기만 하는 승객들은 수유역에 도착해야 우르르 내린다.
문제는 수유역 도착 전에 내릴 때 발생했다. 수유역 전에는 내리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하차벨을 눌러도 버스기사분들이 깜빡하고 문을 안 열어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면 '내려주세요' 이 한마디 말을 크게 내뱉지 못하고 다음 정류장까지 간 적이 많았던 아빠 INFP. 나중에는 내릴 때가 가까워지면 일부러 발소리를 내든지, 헛기침이라도 한 번 하든지, 내가 곧 내려야 되는 사람임을 온몸으로 나타내며 하차문에 다가갔다. 만능은 아니었다. 버스 안에 사람들이 없을 때만 효과가 있었다.
딸 INFP도 똑같단다. 가끔 내리지 못하고 정류장을 지나친다는 말에 걱정보다는 웃음이 먼저 튀어나왔다.
중학교는 집 앞이어서 괜찮았는데, 이제 고등학교는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서 다녀야 한다. 한 정거장 더 지나서 내렸다가 헐레벌떡 뛰는 삶이 제대로 시작될지도 모르겠다.
아빠야 세월이 흘러 이제는 같은 INFP여도 내려달라는 소리 정도는 가능하다.
처음 보는 식당 아주머니나 카페 직원에게도 몇 마디 농담도 던질 수 있다.
앞날이 창창한 딸 INFP는 아직 어려운 게 많다. 혼자 물건을 사는 건 이제 가능하지만, 마음에 안 들어서 환불하는 건 아직 어려운 경지다. 배워가보자. 아빠도 그 나이 때 못하던 거 이제는 하니까.
'정차합니다'가 'STOP'으로 바뀐 만큼,
누르는 버튼의 크기가 손톱만 했던 게 주먹만 해진만큼
세월도 흐르고 아빠도 변했다. 발전했다. 많이 배웠다.
딸도 그렇게 나이가 들겠지.
INFP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들이 남들보다 조금 더 많아 보인다.
글작가 들불호수
그림작가 바라봄
#MBTI
#INFP
#아빠와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