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壽衣)를 입히는 남자

스무 번째 글: 원망과 회한

by tank

C 아주머니와의 인연은 아주머니의 집안 시설을 조금 정리해 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산꼭대기 동네 오래된 집의 한쪽 방을 세 얻어 사는 살림이었지만 나이 든 사람들의 특징처럼 꼭꼭 쟁여둔 물건들이 많기도 했고 몇몇은 불필요한 것들이어서 쌓아두다 보니 집 안 공간이 터무니없이 좁고 불편할 뿐이어서 도움을 요청해 왔기에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해서 좁은 방안을 넓히고 나니 그런대로 공간적 여유가 생겨 마침 이웃에서 나눔을 받은 침대를 놓아주니 “안 그래도 허리가 아파 고생을 했는데 침대 덕분에 좀 편해졌다.”며 호탕한 웃음을 짓던 이였다.


시간이 좀 흘러 아주머니가 살던 집으로 도로가 난다고 해서 집을 비워줘야 할 즈음에 마침 빈집을 리모델링해 어려운 이들에게 세를 주는 구청에서 진행하는 사업의 혜택을 받아 먼저 살던 집보다 조금 더 아래쪽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구청에서 업자를 선정해 집을 조금 고쳤다고는 하지만 여기저기 손길이 많이 가야 해서 처음엔 구청과 집을 수리한 업자에게 불편사항을 전달했으나 이런저런 사유와 핑계로 차일피일 미뤄지는 통에 답답한 나머지 아주머니는 내게 하소연을 해왔다.

짬짬이 틈나는 대로 문에 손잡이를 달아주고 외부로 노출된 배관에 보온재를 감아주기도 하고 방 안에 선반이라든지 거치대 등을 설치하다 보니 가끔은 아주머니의 딸이 어머니를 찾아 이것저것 챙겨주고 가는 모습을 보게도 됐다.


멀리 떨어져 살기에 한 번 들를 때마다 식재료며 음료 등을 잔뜩 챙겨 정리해 주고 가곤 한다는 말에 자녀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 물었더니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아들은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가끔 전화만 되고 딸은 시댁에서 어른들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산다는 말과 함께 한탄이 담긴 한숨을 깊게 쉬기만 할 뿐이었다.

“지 몸도 아파서 힘든데 그 먼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에미 챙길라니 나 때문에 생고생을 하게 해서 내가 딸이 늘 마음에 걸리네. 아들놈이 조금만 정신 채리고 살면 좋겠구마는.....”


구청 지원사업이었지만 집주인이 따로 있는 집이어서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진 집주인이 아주머니에게 ‘이참에 그 집을 사면 안 되겠느냐?’라는 제안을 해왔을 때 아주머니는 내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어왔었다.

마침 그 집에 걸려있는 전세금이나 매입대금이나 같은 가격이었다.

구태여 복잡한 절차를 거쳐 집을 매입할 필요까지는 없었으나 아주머니 얼굴에는 사고 싶다는 표정이 어려 있었으므로 “왜 그러시냐?” 물었더니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딸에게 볼품없는 집이지만 이거 하나라도 딸에게 주고 싶다는 말을 했다.

딸이 한 번씩 와서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남겨두거나 힘들면 팔아서 살림에 보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던 것이다.


리모델링한 집이라고는 하나 워낙 오래된 집이어서 자주 손을 봐야 하는 집이지만 가끔 딸이 힘들 때 언제라도 마음껏 쉬었다 가게 하고픈 생각에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는 자신의 명의로 집을 샀고 딸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다가 혹시나 자신이 잘못되면 자신의 뜻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C 아주머니는 오랫동안 당뇨와 합병증으로 고생을 했다.

조금씩 거동이 힘들어지면서부터는 지역 복지관에서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반찬거리 등을 전해주거나 외출할 때 봉사자가 함께해 도움을 주기도 했으나 코로나 시국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방역 조치에 따라 도움을 받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으므로 딸에게 하소연하는 일이 많아졌고 딸은 그런 엄마를 위해 수시로 친정과 시댁을 오가야 했다.


거리가 가까우면 그나마 조금 낫겠지만 차로도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에서 두 집 살림을 해낸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요양보호사 지원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도움을 신청하였고 담당자의 확인 방문을 거쳐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오전, 오후로 한 번씩 요양보호사가 아주머니의 집을 방문하여 보살피고 병원에도 동행하며 딸에게 아주머니의 상태를 전하는 것으로 딸은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시간은 길지 못했다.

당뇨로 인해 이미 발가락 쪽은 괴사상태에 있었고 피부 곳곳에도 이상 변화가 생겨 절단 수술과 치료가 필요했으나 딸이 더 이상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을 싫어한 아주머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어쩌면 C 아주머니는 이미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C 아주머니의 돌아가신 모습을 처음 발견한 것은 요양보호사였다.

여느 날처럼 방문을 열고 아주머니의 상태를 살펴보는데 미동도 없는 모습에 섬뜩한 느낌이 들어 몸을 만져봤더니 차갑게 식어 있더라는 전언이었다.


마침 두 달 전부터 딸이 엄마의 간병을 위해 옆방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서둘러 딸을 깨워 재차 C 아주머니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내게 연락을 해왔다.

병원이 아닌 집에서 돌아가신 경우라 경찰 공의의 검안이 먼저였으므로 112에 신고를 하게 하고 서둘러 아주머니의 집에 도착하니 정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현장을 보존하고 있었고 처음 보는 낯선 사내 하나가 작은 방에서 담배를 물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가 아주머니가 말하던 아들임을 느낀 나는 그에게 “혹시 아드님이세요?” 하고 물었고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네. 제가 아들입니다.” 하고 짧게 대답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과학수사라는 새김질이 분명한 옷을 입고 등장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뒤늦게 도착한 공의와 함께 여기저기 플래시를 터뜨려가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시신 검안이 끝난 후 “장례식장으로 모시고 가도 좋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흐트러진 시신을 바르게 정돈하는 내 옆으로 예의 그 사내가 들어와 한참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끄억~” 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시신 수습이 끝나고 장례식장에서 보낸 이송 요원이 들것을 들고 올 때까지 사내는 연신 아주머니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알 수 없는 말들을 눈물과 함께 쏟아냈다.

밖에서는 비가 그렇게 서럽게 내릴 수 없을 만큼 통곡을 곁들여가고 있었다.


아주머니 시신의 수습을 마친 후 대기하고 있던 이송차와 함께 장례식장에 도착하여 안치실에 안치한 다음 장례절차 상담을 위해 마주한 자리에서 아들은 그렇게 말했다.

“무조건 최고급으로 해주세요. 제단을 꾸미는 꽃도 수의도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제일 좋은 것으로 해주세요.”

막무가내로 모든 절차를 최고의 것으로 해달라는 아들의 요구에 대해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이라면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고인이 된 아주머니를 지켜본 나로서는 선뜻 내키지 않는 요구여서 아주머니의 형제들과 절차를 상담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식을 듣고 도착한 아주머니의 형제들은 아주머니 자식들의 상황을 궤 뚫고 있었고 아들의 치기 어린 요구에 대해 반박을 하면서 장례 전반에 대한 재상담을 요청해 왔다.

“저 아이는 지금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저 아이의 말을 듣지 말고 우리의 결정을 따라주십시오.”

예우에 어긋나지 않게 형편에 맞는 장례로 진행해 달라는 그들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었다.


장례식장 직원의 불만 섞인 눈총이 따라다녔지만 자칫 발인하는 날 정산을 못해 장례 전반을 망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고 결과는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절차 상담에 대한 조정을 끝내고 빈소로 돌아오니 머리가 희끗한 사내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 있다가 내게 인사를 해왔다.

“제가 큰아들입니다.”

순간적으로 “어?” 하고 놀란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으나 급히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 없었던 듯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언뜻 보기에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것 같은 그와 그의 아내라는 존재에 대해 오랫동안 나와 교류를 이어오는 그들의 이모부가 상주들이 없는 자리에서 내게 전해준 저간의 상황은 이랬다.

고인이 큰아들을 데리고 재가를 한 후 아들과 딸을 낳았으며 성장하면서 서로 융화되지 못하고 반목하던 아들들은 오랫동안 서로 연락을 끊고 지내던 터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연락이 되어 한자리에 모이긴 했지만 서로에 대한 원망과 불신은 여전해서 작은아들은 큰아들에게 “여기 왜 왔냐?” 하는 식이었고 큰아들 역시 작은아들에게 “이렇게 되도록 넌 뭐 했냐?” 하는 식이어서 장례 기간 내내 술에 취해 서로 언성을 높이고 싸우는 통에 가족들이 둘을 떼어놓는 일이 반복되었다.


참다못한 친척 어른들이 “초상을 치르는 동안만이라도 조용히 지내주면 안 되겠느냐?” 하고 형제를 타일렀지만 그도 그때뿐으로 둘의 갈등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인의 사위되는 사람이 그렇게 선할 수가 없어서 장례 기간 내내 상주인 아들들을 대신해 빈소를 지키며 자식의 도리를 해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튿날 아침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는 길에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큰아들이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하기에 “간밤에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도 못 잤어요. 어머니가 원망스러워서요.”라고 대답했다.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과 진하게 배어나는 술 냄새로 보아 엊저녁부터 이른 아침까지 이어지도록 술을 마셔댔던 티가 역력했다.

“장례를 치르는 일이 보기보다 많이 힘든 일입니다. 몸도 조금 추스르고 하세요.” 하고 빈소에 들어왔더니 여전히 사위되는 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밤새 혹시 불편하신 점은 없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덕분에 괜찮았습니다.” 하는 그의 말에서 약간의 위안을 받았으나 접객실 한쪽에 대취한 채로 웅크리고 누워있는 작은 아들을 보면서 지난밤 한바탕 소란이 있었음을 감지한 나는 ‘이 형제들이 사위되는 이의 절반만 되었어도....’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가족들에게 입관준비가 끝나면 모시러 오겠다 하고 안치실로 내려가 고인의 입관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앓은 당뇨로 인해 여기저기 괴사한 피부들에 조심스레 한지를 덧대 습을 마치고 염을 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한 다음 유족들을 부르러 가기 위해 안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아들이 예의 그 만취한 모습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아마도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렸던 모습에 안 그래도 지금 모시러 가는 길이라고 했더니 그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선생님. 오 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입관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가족들이 내려오기 전에 저 혼자 어머니와 함께 인사를 나눌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소란 피우지 않고 조용히 인사만 나누겠습니다.

그런 다음 가족들이 들어올 때 저는 들어오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아주 가끔 입관예절을 할 때 난동을 부리는 이들을 본 기억이 있었던지라 전날 그의 술에 취한 행태가 혹시나 다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간절한 요청을 묵살할 수 없었으므로 그렇게 하시라 하고 그 혼자 안치실에 남겨두고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억지로 슬픔을 삼키는 것보다 울고 싶을 때 울어야 응어리가 남지 않는 법이다.


조금 덜 닫힌 문틈으로 처음에는 낮은 울먹임이 그리고 이내 곧 꺽꺽거리는 통곡이 새어 나왔다.

“엄마.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곳에 가서는 아프지 마시고 행복하게 사세요.

잘 가세요.

엄마. 잘 가세요.”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도록 그칠 줄 모르던 그의 통곡이 잦아들더니 한참 후 퉁퉁 부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로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안고 가슴에 엎드려 통곡을 했었음이 드러나듯 흐트러진 고인의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음 다른 유족들을 불러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하고 염을 하는 내내 유족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인의 영면을 기원했다.


염이 끝나고 입관을 한 후 관 뚜껑을 덮으려는데 기어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들어오지 않겠다던 작은아들이 그사이 또 술을 마셔댔던 듯 대취한 모습으로 들어와 어머니가 모셔진 관을 발로 차며 “어느 쪽이 머리고? 내도 인사 좀 하자.” 하고 소란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가족들이 그를 잡으며 만류하였으나 좀처럼 진정되지 않자 고인의 막내 동생이자 상주들의 이모 되는 이가 그의 뺨을 있는 힘껏 쳐올리며 울부짖었다.

“이 새끼야! 우리 언니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편할 수 있게 정신 좀 차려라.”

몇몇이 그를 강제로 끌고 나간 후 입관절차가 모두 끝나고 지친 감정을 달래기 위해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는 중에 그가 내 옆에 와 앉았다.


“선생님. 소란 피워서 죄송합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마음대로 안 되네요.

죄송합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미묘한 것이어서 때로는 어떤 말로도 표현을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말 뿐이었다.

“한바탕 하고 나니 속이 좀 풀어지셨습니까?”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저녁 무렵 마지막 날 일정에 대해 설명을 마치고 돌아서는 나를 나와 오래 알고 지낸 고인의 동생이 한쪽으로 나를 불렀다.

“장례비용이 얼마나 나올까요? 다른 부분은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니 좀 알려주세요.”

실상 장례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상주들은 의도적인지 모를 정도로 밤낮으로 술에 만취해 무책임할 정도로 장례 진행 상황을 외면하고 있었고 몇 번 장례를 치른 경험이 있는 친척 어른들이 다음날 발인을 앞두고 정산을 해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던 터라 상주들을 대신해 나선 것이었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장례식장 쪽에서 안내를 하겠지만 대충의 상태에 대한 점검이 필요해 보였으므로 장례식장에 부탁해 예상비용을 뽑아보고 가족들에게 부의함을 열어 정리하도록 한 다음 계산을 해보니 대략 이백만 원 정도가 모자랐다.

친척 어른들 중 한 사람이 상주들을 모아놓고 비용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나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서로 나 몰라라 하고 미루며 싸우는 바람에 또 한 번 소란이 일었다.

종국에는 손자들 그러니까 상주들의 아들들이 나서서

“부족한 부분은 저희들이 조금씩 나누어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해서 겨우 일단락되었지만 처음 작은아들의 치기 어린 요구대로 비싼 물품들을 사용해 장례를 치렀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싶을 만큼 속이 미어져 왔다.


발인하는 날 아침.

역시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상주들의 모습에서 지난밤

“내일은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마지막 날인만큼 하루만이라도 맑은 정신으로 어머니를 기억해 주십사” 하는 부탁이 말짱 헛된 일이었음에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어떻게든 마무리를 해야 했으므로 유족들을 불러 모아 빈소를 정리하도록 한 다음 출관 예절을 하고 장지로 향했다.

상주들의 태도에 비해 오래전 내가 찍어준 영정사진에 비치는 고인의 모습은 활짝 웃고 있었다.

어쩌면 힘들었던 한 생애의 수고로움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해방감인지도 모른다.


장례를 마치고 나는 이틀을 꼬박 앓아누운 채로 지냈다.

끝내 서로 반목하던 형제의 모습.

그리고 묵묵히 아주머니의 간병과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던 딸의 눈물.

힘들게 살았던 언니를 기억하며 저세상에서는 행복하기만을 기원하던 동생들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가운데 저 형제를 화해시킬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 속에서 늦게나마라도 그들이 잘 늙어가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과 함께.


마지막까지 자신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던 딸에게 주려고 했던 집에는 작은아들이 들어가 살게 되었다.

아내와 자식들이 있지만 서류상으로만 가족일 뿐 오래전부터 혼자 몸으로 이곳저곳 거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그가 그곳에 정착을 하고 싶다고 하자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딸 내외가 두 말 없이 내어주었다고 한다.


돈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다는 시절에 내 몫, 네 몫을 챙기기보다 핏줄에 대한 연민만으로 기꺼이 제 몫을 내어준 딸의 마음 씀씀이가 그나마 고인과 내게 위로가 되었다면 큰 위로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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