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壽衣)를 입히는 남자

열세 번째 글: 95세 왕초 어머니

by tank


산등성이를 둘러 지나는 길옆 오래된 주택가에 사시던 분이 계셨다.

당시 나이 구십 다섯이셨으니 보기 드문 장수를 누리면서도 살만큼 살아서 허리가 굽어 반이 접혔다는 우스갯소리를 벗 삼아 동네 이곳저곳을 다니며 이웃들의 대소사를 챙기기도 하고 늘 밝고 힘찬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곤 하셨는데 그 연세까지 크게 아프거나 하는 일이 없이 지내시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치아가 하나도 빠진 것 없이 모두 생니 그대로 유지하고 계시다는 것과 어지간한 젊은 사람 못지않은 식욕이었다.


치아는 앞니가 닳을 만큼 닳아 어금니처럼 뭉툭해졌으나 아직 돌을 깨물어 씹어도 좋을 만큼 튼튼했고 그 왜소하고 연약하게만 보이는 체구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를 정도로 왕성한 식욕은 한 번에 짜장면 곱빼기를 드시고도 곁들인 탕수육이나 만두까지 깨끗이 비워내실 정도였는데 오랫동안 함께 이웃해 온 이들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6.25 동란을 피해 남으로 내려와 터를 잡느라 마을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는 고지대에 있는 집이었지만 그분은 한 번도 불편한 기색 없이 구부정한 몸을 이끌고 시장이며 약국이며 또는 당신이 다니고 싶은 곳은 어지간하면 걸어서만 다니셨는데 간혹 사람들이 그 연세에 혹시라도 무리가 갈까 걱정이라도 할라치면 “내가 지금 구십다섯인데 아직도 이렇게 튼튼하지 뭐야” 하시며 굽었던 허리를 쭉 펴 보이고는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야”를 입에 달고 다니실 정도로 건강하시던 그분에게 ‘왕초 어머니’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은 동네에서 가장 고령이시기도 했거니와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이웃들의 대. 소사를 기억하고 챙기는 총기(聰氣) 때문이기도 했다.


연세가 연세인만큼 한 번씩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시면 몇 시간이 지나도록 옛이야기들로 가득했는데 일본강점기 때 무서운 순사들을 피해 도망치던 일부터 6.25 동란을 겪으며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피난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먹먹한 것은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 자식들을 차례로 앞세운 이야기였다.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 병명조차 모르고 떠나보낸 아들부터 돈 벌어오겠다며 집을 나간 후 오래도록 소식이 없다가 부고로 접하게 된 아들까지 해서 자식 넷 중 셋을 앞세우고 마지막으로 딸만 하나 남았다는 이야기는 그분의 연세만큼 굵고 깊게 파인 주름에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고통으로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가끔은 우스갯소리로 “늙으면 죽어야 되는데 나는 얼마나 더 살라고 이렇게 튼튼한지 몰라”라며 “나 죽으면 네가 곱게 보내줘” 하고 농담을 하시던 그분이 얼마 후에 요양시설에 입소하셨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시대의 흐름상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딸이 근처에 살며 한 번씩 어머니를 살펴드리곤 했으나 그도 나이가 들면서 장애가 심해져 몸이 불편해졌으므로 지속적인 부양이 어려워졌고 젊은 사람들이 모두 타지로 떠나가 노인들만 남아있는 동네에서는 누구도 그분을 돌봐드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행정기관에서 나서서 좀 더 편안하게 지내시라고 요양시설로의 입소를 권유했는데 처음에는 자유를 잃는다는 생각에 완강히 거부하셨다가 조금씩 병원에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부터는 생각을 바꿔 입소를 하시기로 결정하셨던 것이다.


그분이 요양시설에 계신 것은 꼭 10년이었다.

처음에는 갑자기 바뀐 환경 때문에 또는 낯선 이들과의 틈에서 겪는 외로움을 이겨내시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특유의 친화력과 재치로 여전히 왕성한 식욕과 활동을 통해 요양보호사들의 도움 없이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규정상 한 곳의 요양시설에 장기적으로 있을 수 없어 그 후로도 그분은 시설을 몇 번 옮기셔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긴 했으나 그곳들에서도 여전히 잘 드시고 잘 지내고 계신다는 소식들로 건강 하나만큼은 타고나셨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분의 임종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한 해의 마지막 정리를 앞둔 어느 날로 따님의 연락을 통해서였다.

“어머니께서 임종이 가까우신 것 같으니 인사드리러 오시라”는 요양원 측의 연락을 받고 가는 길에 내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의 상태를 전하는 연락을 받고 심상치 않은 기운에 나 역시 서둘러 요양원으로 향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도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잘 견뎌내시더니 엔데믹이 거론되던 봄에 감염으로 크게 한바탕 홍역을 치르신 뒤로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그해 겨울 초입에 주무시는 듯 떠난 그분의 모습은 더없이 곱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생전 입버릇처럼 되뇌시던 “내 마지막 소원은 꿈꾸듯 편안히 가는 거야”라고 바라시던 대로 잠들 듯 편하게 떠나신 모습을 보며 “어머니. 저 왔어요. 이제 편히 쉬세요.” 하고 그분의 매무새를 정리해 드리는데 일 년 가까이 누워계셨던 탓에 몸은 깃털처럼 가볍게 여겨질 정도였으나 피부에 욕창 등의 흔적은 거의 없어서 새삼 요양원 측의 세심한 돌봄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장례식장으로 모셔 그분의 바람대로 곱게 장례를 치러드렸다.

통일이 되면 고향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다던 그분의 꿈은 비록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영혼만은 이제 자유롭게 고향을 오가며 지내실 수 있기를 바라는 따님의 뜻에 따라 화장 후 유해를 볕 좋은 시립공원묘지에 산골하고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하늘은 참 맑고 포근했던 기억이 난다.


그분의 연세가 꼭 백 하고도 다섯 되시던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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