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글: 기대수명(期待壽命)과 평균수명(平均壽命)
젊은 세대에게는 케케묵은 이야기이겠지만 예전에 세계 3대 거짓말이 있었다.
하나는 노처녀의 “시집 안 가겠다.”는 말
둘은 장사꾼의 “손해 보고 장사한다” 는 말.
세 번째는 꼬부랑 노인의 “늙으면 죽어야지” 하는 말이다.
이중 노처녀의 “시집 안 가겠다.”는 말은 현시대에 상당히 실현(?)되고 있으니 세계 3대 거짓말 등재에 대해 재검토가 필요해 보이기도 하나 여기서는 노인들의 “늙으면 죽어야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믿거나 말거나 어느 대학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그런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부모님이 언제까지 살아계셨으면 좋겠습니까?”
어린 시절에는 언제까지고 부모님의 품 안에서 오래도록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겼었지만 머리통이 조금씩 굵어지고 사회와 물질에 대해 조금씩 눈이 뜨이면서 욕심이라는 오염물질이 묻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어 그 대답이 조금씩 분명해지기 마련인 이, 삼십 대 젊은이들은 비교적 현실적인 답변을 했다고 한다.
“부모님이 벌어놓으신 재산 부모님이 까먹기 전 까지요.”
이번엔 50대 60대에게 물었다고 한다.
“언제까지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산업화로 급변하는 시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이만큼 발전을 이루어내고 위로 부모님 봉양과 아래로 자식들의 양육을 위해 일생을 다 바쳤지만 정작 자신들을 돌아볼 줄 몰랐던 대부분의 장년들은 그렇게 답했다고 한다.
“딱 칠십까지만.”
마지막으로 요양병원에서 오늘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고령의 노인들에게 물었더니 그러더란다.
“하루만 더.”
웃자고 하면 웃어넘길 수도 있고 비판하고자 작심하면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시대적 자화상을 그대로 반영한 대답들이 아닌가 싶다.
삶의 목적지가 불투명한 이, 삼십 대로서는 부모가 이루어놓은 경제적 안정이 곧 자신의 기반이기도 해서 물려받아야 마땅한 것이라는 생각에 그 재산이 부모의 병원 치료비 등으로 인해 소비되지 않기를 바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한편으로는 부모세대처럼 자신을 희생해 가며 살고 싶지 않은 이기심이 앞선 것이라 볼 수 있겠고 그런 세태에 혀를 차면서도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장년들은 가정을 위해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해 왔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자식 세대들에게 일말의 부담도 주고 싶지 않은 그래서 스스로 자신들의 경제활동을 책임질 수 있는 한계를 정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마지막 요양병원에서 오늘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노인들의 “하루만 더.”라는 대답에서는 아직 매듭짓지 못한 삶의 그 어떤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입버릇처럼 “늙으면 죽어야지. 아프면 죽어야지.”를 달고 살았어도 정작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삶에 대한 집착의 시간이라 할 수 있는 표현 “하루만 더.”
누군가에게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삶의 흔적들을 정리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일 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미처 전하지 못한 고마움이나 미안함 등에 대한 감정의 전달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깨달음에 의해 더 늦기 전에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겠지만 야속하게도 운명은 그렇게 결말지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사회가 발전하고 의료기술이 진보하면서 평균수명은 예전보다 늘어났고 그만큼 기대수명 또한 늘어나고 있다.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이만하면 장수했다고 동네잔치를 하던 환갑, 고희의 나이는 아직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로 전환되었고 70, 80대 에도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활동을 하는 노인들이 많은 시대에 살면서 사람들의 관심사는 단순히 얼마나 오래 사느냐를 떠나 어떻게 하면 자식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내 뜻대로 건강하게 살다가 갈 것인가로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남은 생애를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지? 에 대해 한 번쯤은 진지하게 자신을 살펴볼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