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번째 글: 자식의 도리
그는 삼 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되던 해에 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의 아버지는 얼마 후 새 여자와 재혼하여 그의 밑으로 남매를 낳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가정을 돌보는 일에 거의 무책임했고 자녀들에 대해서도 거의 방임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그가 학교에 가야 할 나이가 되자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지 학교는 무슨 학교냐?” 하고 어린 그를 공장으로 보내버렸고 그 시절의 그는 그게 당연한 일인 줄 알고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조금씩 일을 배워나갔다.
공장에서 일하고 받은 얼마 안 되는 월급으로 아버지와 새엄마 그리고 동생들이 생활하기에는 턱도 없었으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새엄마 역시 그런 아버지와 같은 부류였으므로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집안환경에서도 그는 동생들을 바라보며 형과 오빠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묵묵히 시키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는 그를 보고 처음에는 “어린놈이 학교에서 공부나 하지 무슨 공장일이냐?” 하고 타박하던 공장의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조금씩 기술을 가르쳐주기 시작했고 다행히 익힘의 재주가 있었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사람들처럼 기계를 다루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곧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시키는 것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글을 모르니 도면을 보는 방법도 모르겠고 어림짐작으로 일을 해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 그는 “공부를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을 했더랬다.
“학교에 보내주십시오. 열심히 공부해서 꼭 성공하겠습니다.”라는 그의 말을 아버지는 단호히 끊어버렸다.
“딸린 식구가 몇인데 돈을 벌어야지.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학교는 무슨 학교냐.”
너무도 단호한 아버지의 모습에 절망한 그는 다시 일에 몰두했으나 배움에 대한 갈망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고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발전 없는 무식쟁이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을 나와 무작정 상경을 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 물어물어 숙식이 가능한 공장을 찾아 일을 하게 된 그는 그 시절 노동현장이 다 그렇듯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익히기 시작했고 검정고시를 통해 상급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낮으로 일하고 밤으로 학업을 이어가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문제는 동생들에게 있었다.
집에서 유일하게 돈을 벌어오던 그가 집을 나가 독립을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새엄마는 아버지와 동생들을 버려두고 집을 나가버렸고 워낙 가정에 무책임했던 아버지는 자신이 건사하기 힘들어진 어린 동생들을 고아원에 보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근처에 살면서 근근이 조금씩 도움을 주던 고모가 그 사실을 알고 펄쩍 뛰며 만류했으나 아버지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동생들을 고아원에 보내려고 했으므로 더 이상 막을 도리가 없었던 고모는 막연히 그냥 아무런 곳의 고아원으로 보내 소식이 끊기기보다는 그나마 가끔이라도 소식을 들을 요량으로 자신이 다니는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시설에 아이들을 맡기는 것이 낫겠다 싶어 이리저리 애를 쓴 끝에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시설로 아이들을 보낼 수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동생들이 보내진 시설은 보육과 학업이 병행되는 곳이었고 동생들은 정말이지 억척스럽게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서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후 사회에 나와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조금씩 자신들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낯선 타지에서 고모를 통해 겨우 동생들의 근황을 접해오던 그는 자리가 잡히기 바쁘게 여러모로 애를 쓴 끝에 어렵사리 동생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자신과 동생들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자 그는 아버지를 찾아 인사를 드리기로 하고 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동생들은 자신들을 버린 아버지를 보기 싫다며 반대했지만 그는 “그래도 낳아주신 아버지” 라며 오래도록 설득한 끝에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무책임한 아버지였지만 처음엔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크던 동생들도 그의 모습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그렇게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회한의 시간들이 지나면서 조금씩 앙금이 가라앉고 어느 정도 관계가 회복되자 과거의 일이 마음에 걸렸던 아버지는 한 번씩 겸연쩍은 농담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너희들을 내쫓았으니 지금 이만큼 성공을 했지. 나하고 같이 있었으면 나하고 똑같은 삶을 살았을 것 아니냐.”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직접적으로 “미안하다”라고 표현하지 못하고 에둘러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나약해진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던 중, 그의 아버지는 무릎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폐렴 증세로 요양병원에 옮겨진 후 오래지 않아 심정지로 임종을 맞았다.
코로나 시국이었으므로 면회가 어려운 때였으나 기회가 될 때마다 그와 동생들은 아버지를 찾아뵈었으므로 돌아가신 분의 얼굴은 비교적 평안해 보였다.
비록 자식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지만 무책임했던 자신 때문에 버림받고 고생해야 했던 자식들이 어느 정도 성공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 짐의 무게를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례의 모든 절차가 다 끝나고 며칠 후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 잘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이 되시면 같이 고생하신 분들과 함께 저녁이라도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할 도리를 했을 뿐이라고 사양했지만 거듭되는 초대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 같이 봉사를 했던 이들과 함께 응한 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원망 때문이라도 그렇게까지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참 대단하십니다.”
그가 말했다.
“아버지도 아버지 나름대로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저희들을 버린 것도 아버지 본심이 아니었을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요. 저도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니 한 번씩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성이 착한 사람이다.
한평생 고생으로 자식을 키워도 “아버지가 또는 엄마가 내게 해준 것이 무엇 있느냐?” 하고 덤벼들거나 얼마 안 되는 유산을 놓고도 형제간의 불화를 다투는 이들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일이 흔한 세상에 자신들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 대신 자식의 도리를 먼저 생각하고 동생들이 어긋나지 않도록 잘 이끌어온 그의 모습을 보며 이미 저만큼 멀어진 고인에게 혼잣소리로 말했다.
“영감님. 복을 따따블로 받으신 거요. 자식들한테 고맙다카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