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壽衣)를 입히는 남자

스물다섯 번째 글: 터부(taboo)

by tank


장례를 진행하다 보면 종종 그런 일을 겪는다.

장례지도사 또는 장의사라는 표현을 넘어 염쟁이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와 손끝이 스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을 만큼 거부감을 보이거나 일부러 시선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분명 자신의 가족 중 한 사람을 보내드리는 일을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못 볼 것을 보거나 시선이라도 마주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부러 시선을 회피하거나 움직임에 거리를 둔다는 것이다.


이해한다.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무거운 주제이기도 하거니와 그 죽음의 시작과 끝을 정리해 드리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하루 이틀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민속이나 무속을 통해 오랜 세월을 두고 이런저런 경계를 두던 풍습이 정서에 영향을 끼친 탓에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입에 올리는 것이 꺼려지거나 죽은 이의 모습을 보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상갓집에 다녀온 사람은 집안에 들어오기 전 밖에서 소금을 치고 들어오거나 행여 상여를 메기라도 했다면 깨끗한 물로 목욕을 하고 집에 들어온다거나 삼칠일 동안은 부정한 것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음으로 혹시 모를 액운에 대해 예방하고자 하는 의식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곤 했었다.

이런 풍습은 아직도 간간이 볼 수 있는 것으로 비단 나이가 좀 있는 연령층에서뿐만 아니라 비교적 젊은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유별나게 소란을 떨지 않는다면 부정을 타지 않으려는 또는 부정한 것에 휘말리지 않으려 스스로 자신을 가다듬는 차원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씩 유족 또는 조문객들로부터 불편한 시선을 받게 되면 본의 아니게 살짝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결국은 장의사도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장례절차의 진행 과정 중 습의 과정을 통해 고인의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후 유족들에게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며 인사를 나누게 하는 과정이 있다.


혹시라도 고인과 미처 못다 나눈 말이나 못다 전한 감정의 나눔, 그리고 고인과의 기억 속에서 상처가 남아있다면 그 시간만이라도 용서와 화해를 청해 고인과 남아있는 이들이 묵은 감정들을 내려놓고 고인이 편안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게 함과 남아있는 이들이 위로를 얻게 하려는 배려인 만큼 면역력이 약한 이들이나 후에 시신을 본 것에 대한 후유증이 남을 수 있는 어린아이들을 제외한 가급적 많은 이들이 참관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하면 대부분의 가족들은 고인과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참관을 하지만 앞에서 말한 정서적 영향을 이유로 참관을 원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고인에게 애정이 없다거나 슬픔을 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미 빈소를 찾았다는 것, 그리고 빈소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인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표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고지식한 이들이라면 그래도 마지막 모습인데 참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고 언성을 높일 수도 있지만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강요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장례지도사 특히 염을 하고 입관을 하는 이들에 대한 시선이 조금은 부드러워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들은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들을 대신 나서서 하는 사람들이고 그들과 거리감을 두고자 하는 이들도 언젠가는 그들의 손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마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한 지인이 금기에 유난을 떠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로 일침을 가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이 참 웃기는 게 빨간 글씨로 이름을 쓰면 불길하다고 방방 뛰면서 인감은 죄다 빨간색으로 찍어댄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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