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글: 명절에만 오는 아들들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노부부가 있다.
여든이 가까운 연세에 불편한 몸이지만 티격태격 알콩달콩한 모습으로 어디를 가도 늘 함께 다니며 부부의 의리에 충실하며 기초수급지원금으로 살면서도 남에게 신세 지기 싫어했던 분들이었다.
영감님은 학자 집안 출신으로 자신만 빼고 다른 형제들이 모두 교직에 있다가 정년퇴직했고 자신만 “내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다가 요 모양 요 꼴”이라며 조크를 날릴 정도로 유머가 있는 편이셨는데 집안 이력은 속일 수 없는 것으로 시간 날 때마다 신문지 위에 붓글씨를 쓰는 것으로 소일을 하곤 하셨다.
방문 옆에 한가득 쌓인 신문지에 쓴 붓글씨들을 보면 필력 또한 정중하고 힘찬 맛이 있어 저분이 제대로 공부에 전념하셨더라면 다른 형제들처럼 교편을 잡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였지만 영감님은 아이러니하게도 목수 쪽으로 공사현장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셨다고 한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겠지만 당시의 노가다 일이란 일이 있고 없고에 따라 생계에 영향을 끼치는 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삶의 한 형태였으므로 아주머니 또한 불규칙적인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작은 구멍가게를 열어 집안을 꾸려나갔는데 워낙 자유분방한 영감님 덕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공사현장의 일이라는 것이 비가 오면 쉬고 눈이 와도 쉬고 너무 더워도 너무 추워도 또는 이런저런 사유로 쉬는 날이 많기도 하지만 고된 육체노동을 달래기 위해 몸보신을 한다는 핑계로 술자리도 많은 편이어서 영감님은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는데 급기야는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에 몸에 좋다고 알고 먹은 음식이 탈이 나서 한쪽 눈을 실명하기까지 했더랬다.
아주머니 역시 나이가 들고 몸이 아파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부부는 가게마저 정리하고 이쪽 동네로 이사를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노부부의 생애 일부분이다.
그렇게 조금씩 인연을 이어가던 어느 하루.
아주머니께서 조심스럽게 내게 부탁을 해오셨다.
“집에 손 볼 데가 있어서 그런데 한 번 봐 주실랍니꺼?”
딱히 바쁜 일이 없었으므로 아주머니의 안내에 따라 처음으로 들어가 본 노부부의 집은 산비탈을 따라 집을 지은 건물로 6.25 동란을 피해 내려온 어른들이 급하게 지은 한쪽 벽이 산비탈과 맞닿는 그 시절의 전형적인 구조였다.
공간을 두어 벽을 흙과 떨어지게 만든 벽과 달리 흙과 이웃해 붙은 벽은 장마철이 아니더라도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진득한 습기를 내뿜었고 그 습기들은 고스란히 곰팡이로 변질되기 일쑤여서 어지간히 부지런한 이들이 아니면 관리가 힘든 주택이라 거동이 불편한 노부부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던 터에 내가 방문을 하게 된 것이다.
산비탈과 맞닿은 쪽에 있는 방의 벽은 역시나 곰팡이가 여기저기 번식해 있었고 습기 또한 눅눅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다행히 노부부가 쓰는 방은 그나마 볕이 좀 드는 도로 쪽을 향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이 살기엔 그럭저럭 큰 문제는 없었으나 벽에 매립된 전기가 끊어져 새로이 차단기를 설치해 연결한 노출된 전기선이나 비만 오면 흥건히 고이는 산비탈 쪽 방을 방치해 두기에는 아무래도 위험이 있어 보였으므로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자녀 관계를 물었더니 이제껏 편안해 보이던 아주머니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불편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하고 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려는데 한참을 어두운 얼굴로 있던 아주머니의 입이 열렸다.
“자식이 셋 입니더. 아들 둘에 딸 하나. 딸은 저 짝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있고 아들들은 멀리 있어서 명절 때만 밥 먹으러 옵니더.”라는 말에 무언가 아들들에게 말 못 할 사연이 있구나 하는 짐작에 더는 묻지 못했더랬다.
집수리를 위한 도움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알아보는 중에 이웃들 중 누구도 아들들을 본 적이 없었다는 말과 노부부가 기초수급자로 등재되어 있어 정기적으로 동사무소나 복지센터에서 집수리 등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동사무소 복지담당자를 찾아가 상담을 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노부부의 명의가 아니라 딸의 명의로 되어 있어 건물 수리에 대한 도움은 드릴 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 영감님께서 당신 사후에 아주머니께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게 걱정이 되어 생전에 따님 앞으로 상속을 해 버린 바람에 소유주와 실거주자가 다르다는 이유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일로 영감님은 두고두고 아주머니께 원망을 들어야 했고 노부부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자식들이라도 생활이 넉넉하다면 그들에게 부탁해 요청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아주머니의 완강한 반대가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관계하고 있는 작은 봉사단체에서 도움을 주기로 해 전기공사와 도배. 장판의 수리를 마쳤고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한가위가 지났고 저간의 안부가 궁금해 아주머니께 이번 명절에 자녀분들이 다녀갔느냐고 물었더니 예의 그 어두운 표정으로 한참을 망설이시다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여셨다.
“사실 이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연이 있네예.
남들이 보면 자식도 없는 집이라 괄세할까 말도 안 하고 살았는데 말입니더.”
아주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슬하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고 성년이 되도록 갖은 고생으로 다 키워 왕성히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 한참 젊은 나이인 이십여 년 전 저쪽 세월에 불의의 사고로 아들 둘을 차례로 잃고 그렇게 자식을 앞세운 슬픔 때문에 영감님이 술과 함께 밖으로 겉돌다가 실명까지 당하고는 더더욱 이웃들을 볼 수 없어 이곳으로 이사를 한 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외부출입과 이웃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살아왔다는 이야기에는 진한 아픔이 배어 있었다.
아들들이 명절 때만 왔다 간다는 말은 결국 아들들을 위해 제사상에 밥을 올려 두고 살아 다 전하지 못한 엄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로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명절 때만 오는 아들들.
그 아들들을 위해 정성스레 제사음식을 준비해 상에 올리는 엄마의 마음.
그리고 그런 아내를 옆에서 지켜보고 때로 화도 내고 때로 달래기도 하고 하면서 아픔을 달래는 영감님의 모습이 순간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노부부의 상처를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공연히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더니 오히려 털어놓고 나니 그나마 속이 좀 낫다는 아주머니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더.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이소.”
그나마 몇 안 되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어색해질까 걱정이 담긴 당부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근력이 없어 늘 지팡이에 의지해 다니시던 영감님은 자주 넘어지셔서 병원 신세를 지곤 하셨는데 마지막엔 골절이 심해 수술이 끝난 후 요양병원으로 옮겨야 했으나 코로나 시국의 시작으로 방역지침에 따라 요양병원 입소에 꽤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었다.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이리저리 수소문을 통해 집 근처의 요양병원에 입소할 수 있었으나 당신이 가고 싶은 요양병원에 가고 싶다고 억지를 부리셔서 한동안 애를 먹기도 했다.
방역지침이 조금 완화되면 원하시는 요양병원에 모셔드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생각보다 코로나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영감님은 이듬해 겨울 “집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하셨다.
돌이켜보면 한가득 쌓인 신문지 한 장 한 장마다 빼곡히 적어 내려갔던 붓글씨는 영감님 스스로의 한이 맺힌 삶에 대한 소리 없는 항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고로 앞선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
남아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들.
그리고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자책과 분노.
입버릇처럼 ‘마음은 늘 좀 더 잘해주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제대로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한 마음만 든다.’며 한탄을 하다가도 돌아서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조크를 날리며 억지웃음으로라도 기분을 전환하려던 영감님의 장례가 끝나고 혼자 남은 어머니가 걱정되어 모시고 가겠다는 딸의 말에 아주머니는 손사래를 저으며 말했다.
“아버지도 가고 없는데 아들들이 밥 먹으러 왔다가 내까지 없으믄 어짜겠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