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壽衣)를 입히는 남자

여덟 번째 글: 아버지와 아들

by tank

태어날 때부터 뇌에 장애가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다.

아이가 태어난 기쁨도 잠시, 불치의 병을 안고 태어난 아이를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최선을 다했으나 치료비 등의 경제적인 문제로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행복할 줄만 알았던 가정은 금이 갔고 어린 아들과 살아갈 일이 막막했던 아버지는 알음알음으로 사회복지시설에 부자가 함께 있는 조건으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사회복지시설의 원장님 또한 그런 아버지와 아들을 형제와 부모 자식의 연으로 여기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도움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의. 식. 주가 해결이 되고 직접 아이를 챙기는 수고가 조금씩 덜어지면서 아버지는 시설의 여러 가지 일들을 거들었고 시간적 여유가 생길 때면 동네를 돌아다니며 고물을 수집해 시설의 살림에 보태기도 했는데 그런 그의 손재주를 눈여겨보던 고물상 주인이 그에게 고물상의 잡다한 일을 맡길 정도로 그는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살았다.


그런 아버지의 희생 덕인지 아이는 걱정과 달리 잘 자라 주었다.

가끔 한 번씩 병에 의한 고질적인 증상으로 애를 태우긴 했지만 시설에서 함께 지내던 여타의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해맑게 그리고 더없이 씩씩하게 자라서 스물을 넘기면서는 더는 병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어 있었다.


숫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러나 자신의 의사 표현은 명확해서 때때로 그 아이가 아픈 아이가 아닌 조금 불편할 뿐인 아이로 이제는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라는 착각을 불러올 만큼 매사에 아버지를 닮아 부지런하던 아이는 자신도 나중에 시설의 봉사자들처럼 남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실제로 시설 내의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런 아이가 다시 고통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서른 즈음이었다.

누군가 커다란 송곳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찌르고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찾은 병원 응급실에서는 좀 더 큰 병원으로의 전원을 권유했고 그렇게 찾은 큰 병원에서는 더는 치료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병세가 진행되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이는 회생이 불가한 “뇌사”상태가 되었다.


오랫동안 증상이 없었고 그래서 이제는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싶었던 터에 뇌사라는 그래서 다시는 소생이 어려울 것 같다는 의사의 차가우리만큼 냉정한 선고 앞에서 아버지는 병원 복도에 주저앉아 가슴을 쥐어뜯으며 소리 죽여 울었더란다.

“불쌍한 내 새끼, 불쌍한 내 새끼.”


그렇게 한참을 소리 죽여 울던 아버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의 뜻입니다. 장기기증을 알아봐 주세요.”

어디서 듣고 왔는지는 몰라도 오래전부터 입버릇처럼 말해 오던 “아버지.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면 장기를 기증해 주세요.” 라던 아들의 부탁이었다.

처음에는 아버지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호되게 야단을 치기도 하고 그렇게 야단을 치고 나면 또 모든 게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자책과 원망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나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아들은 줄 수 있는 모든 장기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기기증자에 대한 예우가 빈약한 시절이기는 했어도 장례절차는 아쉬운 부분이 너무 많았다.

함께 있던 복지시설의 원장님이 입관을 지켜보고 싶다고 부탁했으나 소속병원 장례식장 측에서 규정상의 이유를 들어 참관을 못하게 한 부분은 이해할 수 있다.

안 그래도 힘든 결정을 한 이들에게 장기를 기증한 시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일이기도 해서 나였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고인의 관 위에 명정도 관보도 없이 결관만 한 채로 유족에게 인도되었다는 것이다.

장기기증을 택한 숭고한 뜻과 달리 너무도 초라하게 인도된 그 모습을 보고 시설의 원장님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울면서 내게 전화를 해 왔다.

“입관도 보지 못했는데 명정도 관보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고인이 된 아들의 장례미사를 준비하던 중에 받은 연락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미 고인의 관을 실은 이송차는 성당으로 출발한 터라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급하게 인근 장례식장에 명정과 관보를 부탁해 미사 직전에 겨우 관을 덮어줄 수 있었다.


모든 장례절차가 끝난 후 아버지는 말을 잃었다.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아들이 남기고 간 유품을 끌어안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만 흘리던 그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조금씩 겨우 몸을 추스르기는 했으나 때때로 길가의 의자에 앉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은 섣불리 다가갈 수도, 어떤 말로도 위로를 건넬 수 없을 만큼 진한 아픔이 묻어 있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에 시신기증자의 시신을 해부하기에 앞서 시신을 두고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던 의대 실습생들로 인해 사회적 공분을 샀던 일이 있었다.

시간이 흘렀으니 이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장기기증자에 대한 예우 역시 그렇다.

그때보다는 분명히 더 나아졌기를 바란다.

장기를 기증해 새 생명을 살리고 시신을 기증해 의학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숭고한 정신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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