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눈의 깊은 방
먼 길을 오갈 일이 거의 없는 내가, 어제는 오랜만에 먼 길을 가게 되었다.
그래서 낯선 ‘M버스’를 타는 일이 생겼다.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참을 달리던 버스 안에서, 앞 좌석의 아가씨가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고 있었다.
정류장이 가까워지는 걸 아는 듯했다.
아가씨는 자리에서 살짝 들썩이며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때 기사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에서 내려요?”
“네.”
“그럼 벨을 누르셔야죠.”
“아…”
“앞으로는 벨 꼭 누르세요!”
문이 열렸고, 아가씨는 서둘러 내렸다.
여기까지는 흔한 작은 해프닝이었다.
그런데 그 후로 조금 불편한 상황이 이어졌다.
아가씨가 내린 뒤 기사분의 혼잣말이
승객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크게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내릴 거면 미리 벨을 눌러야지…
당연히 서줄 거라고 생각하고…
이러고선 안 내려주면 나중에 민원이나 넣고…”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목소리였다.
버스 안 공기는 살짝 굳어갔다.
그때 나는 문득,
‘오는 길에‘ 이 버스를 처음 탔을 때
벨이 어디 있나 한참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손이 닿는 자리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고,
빨간 벨은 저 멀리, 천장 가까이에 붙어 있었다.
M버스의 벨은 시내버스와 달리 높고 낯선 곳에 있었다.
처음 타는 사람이라면
‘벨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 누르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가씨도 혹시 이 버스를 처음 타는 사람이었을까?
나처럼 벨을 찾지 못했을까?
순간 아가씨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가씨는 그저 내릴 준비를 했을 뿐이고,
기사분은 규칙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많은 민원에 지쳐 계셨을 수도 있었다.
누구도 크게 잘못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길어진 기사분의 혼잣말은
나를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도 저런 오해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겠지?’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작은 불편을 남기고,
그 사람의 마음 속 긴 독백에 등장한 적이 있었겠지?’
그리고 그런 생각 끝에
아주 작은 서운함 같은 게 가만히 자리 잡았다.
사정이 있었을 텐데,
그 사정에 닿아보려는 이해심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았다.
버스 벨은 손을 길게 뻗어야 닿을 만큼 높았고,
이해심이라는 벨은 그보다 더 닿기 어려운 곳에 있었다.
작은 이해심이 부재한 순간이어서였을까,
혹은 작은 실수를 이해받지 못하면
나도 험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불편함 때문이었을까.
설명하기 어려운 그 복잡한 감정은
집까지 걸어가는 길 위에서도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