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눈의 깊은 방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나는 작가는 맞는데, 무명작가이다.
모름지기 작가란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을 더 많은 사람에게
닿게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울고 웃어줄 때
보람이 생기는 직업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직 보람이 적은 작가다.
하지만 모든 것엔 양면이 있는 법.
오늘은 무명이기에 행복한 점에 대해 써보려 한다.
첫째, 시간이 있다.
한국경제신문 더농부에 연재하는 웹툰을 빼면
내가 하는 작업 대부분은 아직 돈이 되지 않는다.
물론 슬프다.
하지만 장점도 크다.
일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J인간인 나는 그래도 스케줄을 짜서
창작하고 업로드하지만
강제성은 없다.
내가 지치면, 쉬어도 된다.
내가 바쁘면, 늦어도 된다.
그래서 나는 춤을 출 시간이 있고,
식구들에게 집밥을 해줄 수 있고,
덕질도 내 스케줄만 잘 맞추면 즐길 수 있고,
독서할 시간도 있다.
둘째, 익명성이 보장된다.
작가는 작품 뒤에 있는 사람이라
얼굴이 팔릴 일은 거의 없겠지만,
유명해지면 그래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추레한 차림으로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것도
조심스러워질 수 있고,
SNS에 글 하나를 올리거나 댓글 하나를 다는 일도
필요이상으로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셋째, 눈치 볼 필요가 없다.
프로가 된다는 건 멋진 일이지만,
돈을 받는 순간부터 제약도 함께 생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작가일수록
그 제약은 더 크게 느껴지지 않을까?
앗! 그런 면에서
더농부 편집팀에는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1년쯤 되는 연재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어떤 제약이나 요구사항을
전달받은 적이 없다.
내 마음대로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분위기.
이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조건이잖아.
나는 요즘 정말 행복하다.
무명이어도 행복하다.
무명이라는 말이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게,
요즘의 나를 증명한다.
춤출 시간이 있어서 행복하고,
프로 작가로 인정받는 웹툰이 있어서 행복하고,
내 안의 내밀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브런치가 있어서 행복하고,
아직 팔로워가 많진 않지만
어떤 이야기를 올리든 늘 공감해 주는
소수지만 찐 팬들이 있는 인스타툰이 있어서 행복하다.
내가 구구절절 쓴 지금 이야기가
사실은 ‘여우의 신포도’ 일 수도 있다.
유명작가님이 이 글을 본다면
“네가 유명하지 않아 봐서 그래.”
하고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런 건 모르겠다.
진실 하나는
나는 작가이고, 지금 행복하다는 것.
그뿐이다.
뭘, 어떻게 끄적이든
결과물이 하나 나오고,
리스트가 쌓여가는 걸 보면
그저 행복한.
이미 나는 내가 꿈꾸던 하루를 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