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보라눈의 깊은 방

by 보라눈

난 좀 진득한 성향이다.

뭐든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냥 가늘고 길게

쭉 좋아한다.

덕질도 그렇다.

덕질 대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큰 이슈가 없는 한 계속 좋아한다.

덕질도 일종의 사랑이라서 입덕 초기엔

불같은 열정으로 덕질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족을 사랑하는 느낌처럼

은은하게 좋아하게 된다.


내겐 좋아하는 가수 한 명과 배우 한 명이 있다.


좋아하는 가수는 내 성격과 매우 닮아 있다.

내 MBTI와 한 글자만 다를 뿐이다.

어쩌면 동병상련의 느낌으로 좋아하기 시작한 듯하다.

때로는 너무 소심해 보여 나를 보는 듯 답답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 자신의 일에 대한 굳은 열정을 보면

존경심이 생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내 성격과 완전 반대다.

내 MBTI와 한 글자만 같다.

이 덕질은 전자와 달리 동경심이

가장 많은 감정을 차지한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자기 소신을,

남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자기 일에 몰입하고

큰 일을 벌일 수 있을까.

한 뼘이라도 닮아보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 둘은 지금 인기의 절정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래서 사실 덕질할 거리도 별로 없다.

시간이나 돈을 투자할 일도 많지 않다.

한마디로 말하면… 재미없는 덕질.

하지만 내 시간을 세이브해 주는 덕질이기도 하다.


그런 두 사람이

엊그제 동시에 콘텐츠 폭격을 했다.


자기 전 무심코 검색했다가

두 사람의 방대한(?) 콘텐츠를 보게 되었고,

11시 30분이면 자야 하는 내가 그만

1시에 잠자리에 드는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그래.

과거엔 덕질하다 밤도 새봤었지만

최근엔 그럴 일이 없이 평안했었다.

요즈음 수면 리듬에 진심이라

웬만한 일로는 늦게 잠자리에 들지 않는데…


늘 잔잔하기만 했던 덕심은

역시 불씨가 남아 있던 불꽃이었나 보다.

새 콘텐츠를 보니 또 덕심이 불타오르고..

내가 잠을 포기하다니!


누군가는 덕질을

그 상대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돈과 시간과 감정을 투자하는

하등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존감 낮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 아니냐는

막말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일이

어찌 쓸데없는 짓이 될 수 있을까.


나를 모르는 상대에게

마음과 시간과 돈을 쓰는 게 덕질일 수 있지만

덕질은 그들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지고,

그 감정은 내 삶을 돌아보게 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딸아이는 요즘 세대답게 버튜버를 덕질한다.

팬아트를 그린다고 얼마나 신중하게

그림을 그려대는지,

그림 솜씨가 일취월장하는 게 보인다.


음…

그래도 수면 리듬에 진심인 내게

1시 수면은 너무 많이 무너진 거다.

일어나는 시간은 똑같아야 하는데..

이러면 5시간도 못 자잖아?


난 투덜거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역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답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