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을 것 같은 중국 도시 상하이.
상하이의 명소를 꼽아보라면 아마도 세 손가락 안에 들 것 같은 곳. 상하이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인 예원입니다. 상하이 명물 요리인 따자시에 이야기를 먼저 올렸지만, 저희도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찾은 곳은 이 예원이었습니다.
예원은 거대한 중국 대륙의 스케일을 잘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금성이나 이화원 같은 베이징의 거대 건축물에 비하면 아름답기는 하지만 소박해 보이는 예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 건물의 용도를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황제의 공간인 베이징과 달리, 이 정원은 1559년, 황족과 전혀 관련 없는(물론 당대의 권신이었다고는 하는) 반윤단이라는 관료가 아버지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 개인적으로 건축한 정원입니다. 즉, 개인의 사택이라는 의미입니다. 황제도, 황족도 아닌 그냥 개인의 저택임에도 이 정도 규모와 예술성을 갖춘 정원이라는 점에서 중국 대륙의 부와 예술성을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 예원은 최초 반윤단이 만든 건축물이 그대로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빠르게 몰락한 반씨 가문과 함께 특별히 역사와 인연이 없어 보였던 이 예원은 이후 태평천국군의 상하이 기지로 사용되면서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데요, 태평천국이 망하면서 그들의 본거지였던 예원은 그야말로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현대의 예원은 이후 1956년부터 약 5년에 걸쳐 중국 정부가 복원한 것입니다.
이 예원을 복원하기 전에는 정말 말 그대로 폐허가 되어 있어, 어디서부터가 예원이었는지 옆의 성황묘와 뒤섞여 버려 (지금도 이 성황묘는 예원 바로 옆에 있습니다.) 알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예원은 원래의 40% 정도 수준이라고 하니, 예전에는 얼마나 더 크고 아름다운 정원이었을지 짐작만 할 뿐입니다.
중국의 근대, 개화기를 상징하는 도시인 상하이에서 상대적으로 전근대적 유적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곳이 이 예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아무래도 상하이보다는 베이징에서 좀 더 많이 접할 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예원의 내부는 이렇게 멋진 수석과 기암괴석들이 운치를 더하고, 날렵한 형태의 지붕을 가진 건축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남쪽 정원답게 연못이 있어 마치 산수를 그대로 집으로 들여온 것 같은 모습이죠.
현대인이 보기에도 손색이 없는 것 같은 조경입니다. 이런 조경들이 이 거대한 정원 곳곳에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어 한바퀴 돌아보면서 지겨울 틈이 없습니다. 다만 원래 이 정원의 설계자가 의도했던 것은 아무래도 멋진 자연경관을 집 안으로 들여와 고즈넉하게 감상하고자 함이었겠으나, 사람이 너무나 많아 그런 운치있는 분위기는 아무래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정원의 거대한 규모에 맞게 전각도 꽤 많습니다. 이 전각은 삼수당으로, 아까 들어오면서 봤던 성황묘에서 주관하던 과거시험의 급제자들이 경축 행사를 치렀다고 합니다. 상하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원 자체는 태평천국의 난 때 폐허가 되었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이 건물은 당시에 성황묘에 섞여 그 화를 면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또 한 가지 이 예원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 용벽에 관한 것입니다.
황제를 상징하는 용은 발가락이 다섯 개입니다. 그래서 황제가 아닌 사람, 예를 들면 조선 왕은 곤룡포에 발가락이 네 개인 용을 그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왕도 아닌 권신인 반윤단이 감히 집 안에 용을 조각한 것이죠. 이 일이 황제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강한 권세를 가졌다 해도 황제의 권위를 넘볼 수 없는 일. 반윤단은 발가락을 세 개로 만들어 놓고, 이건 용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보면 발톱이 세 개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각종 전각들도 들어갈 수는 없지만, 이렇게 내부를 구경할 수는 있습니다.
멋진 수석들도 볼 수 있습니다. 가운데에 있는 수석은 북송의 황제 휘종의 수집품인 옥령룡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예원을 조성할 때 반윤단이 거액에 매입했다고 전해지는데, 진짜 휘종의 소장품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높이가 3m에 무게가 3t이나 되는 거대한 수석은 예나 지금이나 멋진 경치를 만들어 냅니다.
중국 정원은 우리나라 정원과 달리 인공적으로 자연을 조성하는 방식을 활용했다고 합니다. 이 예원의 경우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예원이 조성된 이 부지의 자연형태는 알기 어렵습니다. 이 곳의 작은 호수나 수석은 모두 인공적으로 조성하거나 외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수석도 그렇고, 이 연못들도 그렇습니다.
반면, 우리나라 건축 중 창덕궁의 건축은 이와 대비되는 느낌을 준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창덕궁의 경우 전형적인 궁의 형태가 아니라 궁이 자리한 부지의 지형을 이용하여 이미 존재하는 자연 위에 전각들을 얹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경복궁과 달리 정문에서 정전인 인정전까지 일직선 형태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중간에 꺾어 들어가야 합니다.)
같은 정원인 창덕궁 후원을 생각하면 더욱 그 차이가 두드러지는데요, 같은 동양식 정원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곳곳에서 두 문화가 큰 차이를 보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면, 새삼 이곳이 더욱 이국적으로 느껴져서 여행객 입장에서는 타향의 정취를 더욱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각종 전각 내부에는 이런 수석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자금성의 거대한 수석들도 그렇고, 중국인들은 이런 수석들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구멍이 뚫려 있는 돌들을 중국에서는 길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앞서 정원에 전시되어 있던 거대한 수석도 구멍이 뚫린 돌이었죠.
중국의 역사적 명소들은 이런 식으로 현대적인 조형물을 해 놓은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옛 것 그 자체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보수를 한다거나 이런 형태의 현대적인 장식, 설명 등을 더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는 고대 중국인들이 정원을 조성하던 양식, 그러니까 자연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을 중시한다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풍경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정원을 꾸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현대적인 요소들을 배치하는 것 또한 이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사실 귀엽게 잘 만들기도 했습니다.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가장 오래된 상하이를 만나는 곳이라고 적었습니다.
사실, 3천년 전의 중국을 만나려면 시안에 가야 하고, 천 년의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 백 년의 역사를 보려면 상하이로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상하이는 중국의 근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고, 우리가 상하이에서 기대하는 중국의 모습도 개항기의 모던 보이들이 누비던 공간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 예원은 개화기 이전 상하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입니다. 개화기 이전 상대적으로 역사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한적한 어촌인 상하이가 근대의 물결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의 시간을 간직한 곳이라고 할 수 있죠. 주목받지 않던 시절의 상하이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전형적인 유명한 관광지로서의 예원 말고 또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