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달려, 가자 (GO!)

민유월 ━ 말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by ㅎ과ㅇ

꼬마 원장은 한 해를 더 버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던 바람에 일 년이 지나갔다. 준영이 수능 때까지만. 민주 기말고사 마무리만. 혜진이 파닉스 떼는 것만 보고. (명예) 자식들이 눈에 밟혀서 이별을 미뤘다. 솔직히,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게 자신이 없기도 했고. 칠판, 분필, 마이크가 없으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주 평범한 - 보통의 사람.


▶ Final Quest “집을 떠나라.”


이듬해 겨울, 1대 원장이 찾아왔다. 꼬박 석 달에 걸친 인수인계와 이별 준비는 거침이 없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See You. 최선을 다한 관계에 후회는 제로였다. 그녀는 모든 순간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칠판을 지우면서 분필 가루가 날렸다. 앞으로는 맡을 일 없을 텁텁한 향. 교실을 나서며 그녀는 속삭였다.

“사랑해, 잘 있어. 이 바보들아.”




백수가 된 꼬마 원장은 연기학원으로 돌아갔다. 온갖 대본이 그녀를 불러들였다. 굳이 유혹이 아니더라도, 텍스트의 의미와 전사(前事, 전에 있었던 일)를 유추하는 건 아주 흥미로운 게임이었다. 같은 대본을 받더라도 다섯 개의 해석이 생긴다는 건, 각자의 서사를 가진 다섯 명의 인물이 태어난다는 얘기잖아. 글쓰기의 관점에서 그런 수업은 어디 가서도 배우기가 어렵단 말이야. 구조적인 글쓰기, 작가의 의도 전달하기, 동물을 소재로 하는 워크숍 같은 뻔(NOT FUN) 한 것들 말고. 글이 말이 되면서 벌어지는 생생한 탄생의 순간들! 그래, 어쩌면 난 이런 걸 배우기 위해 살아남았는지도 몰라 ♪

그녀는 (다른 의미로) 문제 학생이 되었다. 학원에서는 실적 – 오디션, 단역 출연 등 – 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미안해했지만, 당사자는 암시랑토 (아무렇지도) 않았다. 출석하고, 수업 듣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요! 해맑은 그녀에게 다들 묻곤 했다. ‘꿈이 뭐야?’, ‘언니는 뭐가 되고 싶어?’ 글쎄. 알아가는 단계에서 함부로 말해도 되나. 짧은 고민을 마친 꼬마 백수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행복.”


나는 행복해질 거야. 그거면 돼. 돈도, 명예도 필요 없어. 내 우선순위는 나야 나. 내가 나로 서 있을 수 있으면 좋겠어. 아아. 원초적이면서 심오한 목표 말고, 직업적으로 묻는다면…. 작가. 사람들한테 얼마든 실컷 넘어져도 괜찮다고 전하고 싶거든. 글로, 말로, 영화로. 힘들 거라고? 오히려 좋아! 그게 내 히든 퀘스 트니까. 한 차례 세상의 풍파를 맞은 꼬마는 나름대로 강해졌다. (+ Level UP!)

남들보다 빠른 삶은 외롭기만 하고 – 재미 하나도 없던데. 어차피 다른 사람들과 같은 템포로 살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이번엔 안단테(* 느리게)로 가는 거야! 열심히 버티고, 간신히 눌러도, 자꾸만 튀어나오던 진심이 목소리를 되찾았다. 꼬마 백수는 다시 펜을 들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펜촉에서 통통 - 튀어나왔다. 사자와 소녀의 우정, 엄마의 남자친구를 받아들이는 꼬마 아가씨, 부상으로 꿈을 접은 운동선수, 은퇴한 히어로.


▶ Warning :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


어라. 나 진짜 열심히 썼는데! (억울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소재도 천차만별에 그래서 원고지 70매 안에서 하려는 이야기가 뭔지 보이지 않긴 했다. 퇴사하고 처음 도전한 분야는 가장 만만했던 소설. 그것도 단편. 분량이 적으면 쉽지 않을까?! 그 생각은 상당히 안일한 오해였다. 제한된 글자 수 안에서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주인공의 변화를 묘사하는 데는 상당한 테크닉이 필요한 게 아닌가! GG, 다들 어떻게 등단하는 거지? (꼬마의 목표는 등단이었다) 안 되겠어. 이래서는, 그냥 연기학원만 열심히 다닌 작가 지망생에 그치겠는데.

에이, 그건 시시하잖아. 원장직도 때려치웠는데. 말만 하지 말고, 사람들한테 뭔가 보여줘야지. 그치만 시간이 필요해. 정확히는, 성장하는 동안 남들이 날 합법적으로(?) 기다려줄 수 있는 명분. 신춘문예 도장 깨기보다 확실한 성과가 필요한데…. 평소와 달리 그녀의 고민이 길어지자 NPC가 두 가지 선택지를 주고 사라졌다.


① 방송국 막내 조연출로 입사

② 관련 전공학과에 입학해서 공부하기


그녀의 선택은 2번. 늦은 나이에 (어린) 만학도로 대학에 다시 진학하기. 이거야말로 무모한 도전 그 자체였다. - 하지만 그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 말했잖아, 명분이 필요했다고. 졸업 전까지는 ‘학생이니까’ 용인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꼬마 원장은 기꺼이 어린 만학도가 될 준비를 했다. 자유 대사? OK. 장면 만들기? OK. 그래서 그것들이 재밌단 이유만으로 뭘 어떻게 할 건데? - 이건 주변 사람들을 붙들고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이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예비 만학도는 전략을 짰다. 할 수 있는 것 = 장면 만들기, 하고 싶은 것 = 글쓰기. 이 조합으로 도전해 볼 수 있는 입시전략은 크게 두 가지. 공부 / 연극 연출 실기 준비. 목표는 한중동한. 일명 한예종·중앙대·동국대·한양대, 대한민국 연영과의 메카! 무조건 그중 어디든 들어간다! - 안단테를 고른 것치고 과격한 선택이긴 하다만. 인생은 원래 기세 아니던가?! 좋았어, 가 보자. GO! 붙든 떨어지든 내 인생 안 망해! 강사로 전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그녀는 자신감이 220%인 상태였다. 다시 말해, 눈에 뵈는 게 없었다. - 에이, 다들 알잖아. 청춘의 상징은 무대뽀란 거 -




겁쟁이라고? BINGO. 정확한 지적이다. 사실 무서웠다. 이제야 때아닌 사춘기를 맞았는데, 내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줄 건데? 주제도, 장르도, 방법도 모르면서. 무방비상태에서 일로 꿈을 시작하면 또 한 번 날개가 꺾일까 봐. 기대한 만큼 상처받고 수그러드는 그 과정을 연달아 겪을 준비가 안 됐다. - 그건 누구도, 평생을 각오해도 안 될 것이다만 - 어린 (예비) 만학도는 한 발의 예방주사면 됐다. 몇 년만 벌면 희곡이든, 소설이든 어딘가에서라도 ‘작가’로 나설 수 있겠지. 스스로 가늠한 가능성의 크기는 딱 그 정도였다.

애매한 재능. 갖기엔 초라하고 놓기엔 아까운, 그러나 잘 가다듬으면 언젠가는 빛을 볼지도 모르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호한 희망. 그녀는 그 한 줄기 빛에 미래를 걸었다. 꼬박 1년을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간절하니까 뭐든 상관없었다. 주변의 우려, 위로, 평가…. 그런 것들은 들리지도 않았고, 오직 글자만 눈에 들어왔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로다. 그 무채색이 한 사람의 세상을 밝혔다. 입시는 전형마다 틀과 모범답안이 있다. 누구라도 창작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예술이라는 장르가 정답이 딱 떨어질 수 없어서인가, 평가기관에 따라 정답의 근접 순위가 바뀌었다. 남다른 시선, 스토리의 내구성, 고전 내러티브의 활용법, 비평 능력. 무엇 하나 덜 중요한 게 없었다. 모든 걸 쪼개고 붙이는 과정에서 그녀는 수도 없이 부서졌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마음은 1g도 줄어들지 않아서, 연기학원에서 연출법과 작가이론을 공부하던 문제 학생은 무턱대고 수험장에 들어갔다. 돌이켜보면 떨렸다. 아주 많이. 한 학교는 공간연출과 영화과 중 실기 방법을 골라야 했다. 공간연출은 소묘가 필수였다. 그래서 영화과로 원서를 넣었다. 그건 도박이었다. 이야기 구성 / 영화분석 / 영화과 논술 중 하나가 시험으로 나오는 학교라서. 그녀는 간절히 빌었다. 이야기 구성아, 나와라. Please!

과연 시험문제는? 당연히 - 는 아니고 다행히 – 1순위였던 이야기 구성 당첨! ‘주어진 장면을 읽고, 앞뒤 장면을 상상해서, 연결된 완성본을 1,500자 안에 적으시오.’ 장르는 영화지만 종목은 창작이었다. Finally, 나만의 상상과 설계기법을 보여줄 때가 왔잖아! 앞뒤 장면에 대한 정답은 애초에 없어. 길은 내가 만드는 거야! 그녀는 시험지 위로 돌진했다. 흑심이 원고지 사이사이를 누볐다. 열심히 분석하고, 상상하고, 창작한 결과 차가운 불합격을 받았다. 역시, 새로운 시선에서의 해석이 부족했나? 일 년 더 도전해봐야 하나. 그럼 졸업이 늦어질 텐데 -. 그러던 어느 날, 꼬마 원장(이었던 사람)에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 튜토리얼 종료, 새로운 던전 Art - OPEN ◀


Artist 민유월, 지금부터 진짜 게임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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