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하 ━ 기록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몇 해 전, 나는 패션 일러스트를 가르치는 일을 했었다. 사람의 몸은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에 대한 기본기가 있어야 표현하고 싶은 실루엣과 디테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다. 3주 동안 선 연습을 하고, 4주 차부터 본격적으로 인체를 그리는 커리큘럼으로 진행했다. 일주일에 한 번, 비대면 수업을 듣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나는 그 아이에게 첫 주는 직선, 그다음 차주는 곡선, 마지막 3주 차 수업엔 원을 그리게 했다. 화면 너머로 아이와 함께 원을 그리며,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수천만 번 그린다고 해도 완벽한 원을 그릴 수 있을까? 선생님인 나조차도 지금 찌그러진 원을 그리고 있는데.’ 지금도 누가 나한테 원을 그려보라고 시키면, 분명 찌그러진 원을 그릴 것이다.
예술을 시작하고부터 새삼스레 자각한 것이 있다. 내가 지독한 완벽주의자라는 것. 타고난 성향이라 인정하고부터는 지금의 나에겐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지 않지만, 작업을 쌓아야 하는 시점에서 완벽주의는… 치명적인 걸림돌이었다. 당시, 나는 한 달에 하나의 그림도 완성하지 못했다.
미술 작가라면 전시를, 글 작가라면 출간을, 음악가라면 앨범을 발표한다. 창작을 지속하려면 자신의 작업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창작은 발표가 전제되며, 발표는 평가를 수반한다. 나는 그 평가가 두려웠다. 내 눈에도 완벽하지 않은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부끄러웠다. 최종, 진짜 최종, 진진짜 최종, 이게 진짜로 최종. 이 과정을 열댓 번은 해야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사람은 완벽할 수 없지. 그래, 잘 알고 있다. 세상에 완벽한 게 단 하나 있다면, 신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엔 너무 많은 기준이 존재하고 하나하나 맞춰가기엔 지표가 수천, 수만 개가 넘으니 애초에 완벽을 기대하고 살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완벽’이란 단어를 접하고, 그보다 더 자주 언급한다. 완벽한 몸매, 신이 내린 목소리, 흠 없는 삶 등 어쩌면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을 무의식적으로 쫓는다. 나에게도 모호한 완벽의 기준이 있었다. 그 기준은 대개 타인으로부터 찾았다.
나는 자주 부러워했고, 그만큼 더 자주 속상해했다. 그들과 동일 선상에 놓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이라곤 살을 붙이고 다시 고치다 결국 엎어버리는 것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작업물을 보고, 나란 사람을 대입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도망치다 보니 작업을 미뤘다. 미루는 게 쌓이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이 됐다. 이 반복은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기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돌파구. 나에겐 돌파구가 필요했다. 완벽이라는 늪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목표를 다작으로 설정하자.’
모호한 기준을 두지 않고 일단 다작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다음 스텝, ‘우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전시를 위해 출품하자’였다. 별 거 아닌 다짐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겐 큰 결심이었다. 의도에서 벗어난 붓칠 한 번조차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지금도 완벽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완벽보다 완성에 두니 오히려 나아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병행하는―나 같은 다중 작업자에겐 다작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완벽을 고집했다면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작업에 매진하지만 정작 결론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퇴근 후, 책상에 앉아 맥북을 켠다. 둥―하고 짧은 사운드가 울리면 익숙하게 한글 프로그램을 띄운다. 희고 텅 빈, 마치 내 머릿속과 같은 대지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본다. 십 분 정도 지났을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손가락을 움직인다. 다섯 줄 정도를 채웠을까. Cmd+A를 누르고 Delete키를 누른다. 그렇게 내 30분이 날아간다. 또다시 타닥타닥 손가락을 놀린다. 이번엔 10줄이다. 문장을 샅샅이 들여다본다. 이번엔 3줄만 남기고 20분의 시간을 날린다.
이 과정을 계속해 덧붙이다 보면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작업자로서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 있다면, 엉덩이 싸움에 자신이 있다? 나는 늘 시작이 어려웠다. 하지만 일단 적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끝마칠 가능성이 80% 이상이었다. 망설임은 길지만 시너지가 붙는 시간은 짧다고 해야 하나. 나는 매일 8시간 이상 작업 시간을 가지려 한다.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확신은, 여전히 없다. ‘순수’ 작업 시간이 조금씩 늘어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작은 칭찬을 해주는 게 전부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다작으로 큰 성과를 이뤘다거나 바라던 지점에 도달하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동안 나는 지속할 힘을 얻은 것이다. 와중에 깨달은 점은, 결과만 내보이는 게 예술이 아니었다.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나온다. 내가 집중해야 할 건 완성도가 아닌, 태도였다. 발표 이후의 것들은 내 몫이 아니라 그저 해오던 데로. 루틴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다작 또한 쉽지 않다는 거였다. 나는 ‘일단 해보자’에 거부감이 컸다.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세우고 세부적인 계획이 머릿속에 구현이 된 다음, 성공과 실패 가능성이 계산되어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근데 사실 이건 다 핑계다! 나는 이 핑계 프로세스를 무너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깨닫지 못해 빙빙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혹시, 나 같은 사람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완벽주의를 무너뜨리고 다작을 목표로 삼아보길 권해주고 싶다. 나도 현재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자주 망설이고 두려워하지만, 그것조차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라는 걸 이젠 안다.
묘사될수록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싶다. 완벽한 삶이라는 묘사보다 애쓰고 짓밟히고. 그럼에도 꿋꿋이 견딘다는 묘사가 이젠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당장의 감정에 기대 회피해 버리는 것이 아닌, 오늘은 영감님이 안 오니 미루자는 핑계가 아닌, 보잘것없는 나와 마주하고, 의자에 어떻게든 엉덩이를 들이미는 인생이 아름답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의 삶도 그러하다. 난 그런 당신들을 알아봐 주고 응원하고 싶다. 마음을 담은 문장이 불특정 다수에게 흘러가 스며드는 순간을 애정하며 살고 싶다.
여전히 버티고, 누르고, 빠져나오는 나, 당신, 우리의 삶을 기록하는 자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