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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in Oct 30. 2021

조금은 과하거나, 아니면 그저 그렇거나

인문학 주변을 맴도는 실용주의자 '사이토 다카시'의 두 권의 책을 읽고

자신과 세상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을 싫어하는 경우가 있을까? 태어나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나'와 '세상'에 대한 이해는, 죽을 때까지도 불가능하기에, 바벨탑을 쌓으면서 신에게 도전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인문학을 통해 그런 세상 속의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헤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분야로 자리잡았고, 세상이 복잡하고 넒어진만큼,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역사와 예술을 지나, 심리, 관계, 교육 등의 다방면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읽은 책을 정리하다 발견한 사이토 다카시의 두 권의 책은, 사람들이 얼마나 인문학을 사랑하고 따라하고 싶은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었다. 모든 길은 인문학으로 통하듯이, 그의 책 두 권은 공교롭게도 인문학을 맴돌며, '과하거나 또는 그저 그런 이야기로 버무려진 먹기 맛있는 책'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1. 조금은 과한 고독 예찬 <혼자있는 시간의 힘>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혼자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어 진정한 "혼자"가 존재하기 어려운 세상되었다. 인터넷을 통한 페이스북 블로그 트위터 들의 신무기들이 사람과 사람사이를 꼬치처럼 연결시키고, 때로는 혼자있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절대 공존의 그런 세상이 온 것이다. 


때로는 복잡한 놀이동산에서 느끼는 적막감처럼 어쩔 수 없이 대중들로부터 분리되어 고독함을 느끼는 것이 아닌, 순수 그 자체로 자신을 위한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혼자있는 시간의 힘>을 읽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했다.


저자 다카시에 따르면 혼자있는 것 자체가 사람의 사고를 영글게 하고, 숙성시키는 힘이라고 믿는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위인들이나 문학가들의 사고가 바로 혼자있는 시간의 힘에서 나왔다고 믿고, 심지어는 고독을 예찬하기까지 한다. 나의 심신을 다듬는 조탁의 정서적인 행위, 그리고 혼자서 걷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지극히 수양적인 태도를 찬양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게 하기 위해서 롤모델을 제시해 주는 친절까지 베푼다. 잊지 말아야 하는 문구에 줄까지 그어주는 친절과 함께...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극단적인 '고독 예찬'이 아닌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으로서 자기 회복의 과정으로서 더 중요하다. '절대 고독의 미덕'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줄지는 몰라도, 우리가 인간관계를 지향하고 있는 이상, 단단해진 자신은 오히려 더 아집과 고집으로 무장한 '솔리스트' 혹은 'loaner'가 되기 십상이기도 한 이유다. 결국 우리는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관계를 재정비 하는 시간이 필요할 뿐 관계 자체의 단절이 필요하지는 않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의 고독 예찬론은 조금 과한 측면이 있다. 물론 한 권의 책읽기로 그 사람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유독 일본에서 고독에 관한 책이 인기가 많은 것을 보면서 문화적인 차이라고 이해하고 싶지만,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해지는 고독 예찬론은 독자의 저자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더욱 혼돈스럽게 만든다. 

#2. 그저 그렇게 재미있게 흉내낸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


<혼자있는 시간의 힘>이 과한 표현이라면,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은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그저그런 역사이야기를 담고 있다. 입시를 앞 둔 고교생이 논술 시험을 앞두고 정리차원에서 읽거나, 대학 신입생들이 역사를 배우기 위해 읽어야 할 아주 기초적인 내용만을 엮어 놓았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언제 있었던 대통령 선거때였을까? '역사를 모르면 미래도 없다'라는 말을 유행시킨 후보자의 말을 기억하며,어쩌다 우리는 역사를 홀대하고 역사를 잊고 싶어하는, 아주 미래 지향적인(?) 민족으로 전락했는가 반성해 왔고, 반복되는 굴곡을 끊어내기 위해 역사는 미래를 위한 반드시 알아야 할 배워야 할 느껴야 할 우리의 발자취라고 생각해 왔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정치를 움직이는, 경제를 움직이는 등의 제목이 넘쳐나는 역사서적 중에서 크게 새롭지 않은 다카시의 책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사를 이해시키는 대상이 일반 대중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역사는 쉽게 표현하고 재미있는 기술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물질에 대한 욕망과 커피로 상징되는 잠들지 않는 개발의 회오리, '철, 금, 식민지'라는 근대시대의 특징을 넘어서 최근의 브랜드와 소비의 욕망은 경제사적인 측면에서의 동력을 상징하고, 시각화로 상징되는 모더니즘은 자본주의의 탄생을 야기하며 중세를 몰락시키며 근대와 정보화 사회로 다가서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모더니즘이 말 그대로의 문화 사조를 넘어서 정치적인 권력과 결탁함으로서 개인을 압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모더니즘 출발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또한 대외 침략과 단결의 발판을 제공한 제국주의는 비단 1,2차 세계대전의 발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신제국주의로 표현될 만한 침략전쟁의 정당성을 제공해 주며. 이는 역사적으로 몬스터라고 불릴만한 나치즘은 물론, 경제사적 정론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변종을 만들어내게 된다. 아마 제국주의는 영국, 프랑스 등 선발 제국주의에 도전하기 위해 히틀러가 홀로코스트와 같은 반인륜적 자행을 저지르게 되는 이유를 제공하며, 히틀러가 세계사의 한 축을 차지하는 이유는 그 내면의 악보다는 상황이 만들어낸 창조적인 괴물이라임을 역설한다. 


마지막으로 종교는 세계 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임은 분명할 터. 하나의 신에서 나온 세 자식들의 분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종교로 인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현재의 기막힌 상황에 종교의 필요성에 의문이 들기도 하고 종교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가 물질 만능, 자연환경의 파괴 등 비인간적인 일들에 대한 반사작용이라는 말이 우리의 복잡한 실상을 더 적나라하게 표현해 준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다카시가 선택한 이 다섯가지 힘은 그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설득력을 주지 못한다. 어디선가 보고 들은 듯한, 또는 읽었던 기억들이 살아나 책의 내용들이 오버랩 되기 때문이다. 시중에 넘쳐나는 <이야기 미국사>, 명작 <총균쇠>, <종교전쟁>, <독재자>와 같은 책은 물론이고 '그리스 철학'과 '동서양 사상의 차이', '자본주의와소비, 주체성의 상실'과 같은 개념적 요소들이 서로 물리고 물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역사가 하나의 요소가 아닌 상호작용하며 세계사를 움직이듯, 많은 책의 내용을 끄집어 내어 집대성 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기 보다는 읽을 수록 그저그런, 세계사 변화 요소를 '재구성만' 한 책으로 이해되기 쉬운 문제를 가진다. 장점이라면, 책을 마치고 다른 책을 통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들게 한다는 것.


역사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일본에 대한 선입관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초적인 수준에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을 선정하여 저자의 관점을 양념으로 다시 한 번 재구성하여 쓴 책. 쉽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책. 역사를 교육시키기 위해 쓴 책. 반드시 더 깊은 역사 인식을 위해 또 다른 노력을 필요하게 만드는 책.


'일본은 역사교육이 잘 정리되어 있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보고, 일본이 '모방'에서 출발하여 경제대국에 이르렀지만 역사는 아직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진실'이 자꾸 떠오르는 건 이 책을 나만의 선입견은 아닐 것이다. 일본의 역사에서 보듯이 그의 역사 책은 인문학을 관통하지 못하고 인문학 주변을 맴돌며 한 번 읽어보라며 우리에게 눈웃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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