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표현하는 것
이 영화는 시작부터 스스로 여타 벨파스트 영화들과 차별될 것임을 선언한다. 마약에서 섹스, 그리고 폭력들이 아이리쉬 힙합 위에서 자유롭게 묘사된다. 허나 이런 장면들이 단순히 선정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영화 속 '아일랜드어'의 지위 인정이라는 주제 속에 꽤나 자연스레 녹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의 저항정신,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인 언어의 자유로운 사용과 같은 다소 무거운 주제를 재치있게 풀어내기에 힙합이라는 소재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게 느껴졌다. (*물론 영화 속 '니캡'은 실제로 존재하는 힙합 그룹이다.)
래퍼 피타입(P-TYPE)은 과거 힙합은 폭력적인 잡종문화라고 칭했다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의도가 어찌되었던 간에 힙합과 폭력성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와 라임 배열을 통해 본인의 메세지를 4분의 4박자 속에 녹여 내는 예술이 힙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다르게 생각해보면 메세지를 담는 형식이 폭력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지탄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것과 반대로 정제된 언어 안에 담긴 메세지 역시 충분히 폭력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언어를 통해 저항정신을 드러내는 랩과 정제된 언어로 차별과 통제를 정당화하는 선언문 중 진짜 폭력은 무엇인가.
한국 힙합 씬의 해묵은 논쟁 중 하나는 랩을 하는 데에 있어 한국어가 적합한 언어인가이다. 이 문제에서도 역시 피타입을 거론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그는 예전에 어느 대학교수와 한국어로 다양한 라임이 가능한가를 주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으며, 네이버 뮤직 칼럼에서 각운노트를 직접 공개하며 한국어 라임 사용에 관한 방법론을 제시하기도 했다(지금은 네이버 뮤직이 바이브로 바뀌며 과거 칼럼들이 다 사라져버린 듯하다). 그럼에도 한국어가 다양한 라임 패턴을 형성하기에 부적합한 언어라는 관점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라임(각운)이라는 건 엄밀히 말하면 nucleus(중성)와 coda(종성)가 합쳐진 구조이다. 'Time', 'Rhyme', 'Dime'처럼 같은 rhyme의 구조가 반복되어야 rhyme scheme이 형성되고, 이게 곧 운율의 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힙합에서 사용하는 라임 배치의 대부분은 pseudo-rhyme들의 패턴이며, 비슷한 발음의 단어들을 끝에 배치시키는 워드플레이에 가깝다.
이센스, 버벌진트, 딥플로우 등 이미 많은 래퍼들이 한국어로 충분히 괜찮은 라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기에 위와 같은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그러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한국어를 랩송에서 밀어내려는 시도들에 대한 비판이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영화 <니캡> 속에서 아일랜드 힙합에 관한 논쟁이 나오는데, 결국 그것의 근간은 '언어'를 지키고 사용하는 것이었다. 힙합이 미국에서 태어난 문화이지만 결국 각국에서 로컬라이징 되면서 바뀌는 가장 큰 요소는 역시 언어이다. 자국의 언어로 재치있는 가사를 써내려 가는 것이 결국 숙제이자 숙명인 것이다. 한영 혼용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로 모든 가사를 써내려가며 미국의 것을 그대로 따라가려는 시도는 힙합이라는 장르 안에서 어떠한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이 났던 노래는 MC 메타와 DJ 렉스의 '무까끼하이.' 정말 오랜만에 다시 들었는데, 막상 발매 당시에 접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게 들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