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완벽하지 못했던 날들을 뒤로 하고

by 빠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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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자라다가 경쟁에 밀려 몸통이 굽어지며 자란 편백나무


예전부터 귀에 박히게 들었던 말들 중 하나는 자신이 속한 환경이 세상의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속한 집단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의 축소판이 아니니 안주하지 말고 더 노력해서 뒤처지지 않으라는 의미였다. 물론 어렸을 때에는 이 말이 이해는 갔지만 마음 깊숙히 와닿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속한 곳에서는 나름 높은 성과를 내고 있었기도 하고, 목표 자체를 아주 높은 수준으로 잡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의 퍼포먼스에 만족했던 것이다. 지금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그때보다는 고개를 더 끄덕였을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소식을 훨씬 더 잘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 공감의 결과가 성장을 위한 더 강도 높은 노력으로 이어졌을지, 아니면 좌절감에 따른 회피로 이어졌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름대로 괜찮은 성과를 내서 딱 원했던 정도의 환경으로 옮겨 갔을 때,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였을 때, 그 안에서는 새로이 계층의 재편성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극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수준 차이는 아니었기에 그 좌절감이 오래 가지는 않았지만 앞서 어른들로부터 귀에 박히게 들었던 그 말이 괜히 했던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때, 그 무력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절실한 노력이라는 걸 더 늦은 시기에야 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또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 위해, 다른 환경의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 열과 성을 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울인 노력의 대가가 꼭 그에 응당하는 보상으로 돌아오리라는 법은 없었다. 나의 꿈에 다가가기 위해 세웠던 첫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는 꽤 순탄하게 단계들을 밟아갔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 관문의 문턱에서 연거푸 실패를 맛보았고, 나는 두 번째 좌절감 속에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자책 뿐이었다. 한 두번 실패했을 때에도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이후 실패가 거듭되면서 나는 스스로를 경쟁에서 낙오된 패배자로 낙인 찍었다. 고다 아야의 <나무>에 묘사되는 굽어진 편백나무처럼 나는 점점 움츠러들고 있었다. 내 옆에 나와 비슷하게 솟아 있던 다른 나무들은 다 곧게 뻗어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상의 쓰라림이 더 짙어졌다. 이미 한 번 굽어버린 나의 몸뚱아리는 다시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굽어진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덜 아프게 생존해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만 했다. 품고 가야 할 상처인 걸 인정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종종 미술관에 가는 걸 즐긴다. 예술에 조예가 깊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미술관의 다양한 작품들 속에 있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예쁜 꽃이나 예쁜 옷을 보면 저절로 눈길이 그곳으로 옮겨지는 것처럼 미술 작품 역시 그러한 식으로 끌리는 것들이 있다. 가만히 보면서 '왜 이 그림에 끌렸을까',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와 같은 생각에 잠기곤 하는데, 이러한 작품을 단 한 두점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날 전시 관람에 높은 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위대한 작품을 마주하는 것이 마냥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품들은 보자마자 그 정교함 또는 웅장함을 내뿜으며 보는 나로 하여금 압도되게 만든다. 그 압도감 다음에는 경외감이, 그 경외감 뒤에는 반드시 씁쓸함이 남는다. 그것들이 주는 위엄에 비해 그 앞에 서 있는 내가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의 위엄과 반대로 아무리 화려한 프레임 안에 있어도 뚜렷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초라함이 대비될 때면 마음 속에서 참 오묘한 감정이 일렁인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작품들을 접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러한 초라한 기분을 경험하고 집에 돌아와 새벽 감성에 젖어 울적해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에너지에 힘을 얻는 경우가 더 많았다. 회랑을 거닐며 작품과 그 작가에 경외감을 느낌과 동시에 그 대단한 작품들을 종종 볼 수 있을 정도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처지는 되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아직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는데, 만약 가게 된다면 해외에 있는 미술관에 가보고 싶다. 그 중에서도 뉴욕 현대 미술관(MoMA)는 내 첫 번째 버킷리스트이다. 군대에서 우연히 '모마 하이라이트'라는 책을 읽었었다. 작은 책이긴 했지만 교과서에서나 보던 작품들을 저곳에 가면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팍팍한 삶이지만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 가장 보고 싶은 작품은 잭슨 폴록의 <One: Number 31>. 그냥 사진만 봤을 뿐인데 뭔가 끌렸다. 초라하고 굽이진 기둥이지만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소소한 취미, 그리고 팍팍한 삶을 버티게 하는 목표가 있어 그래도 아등바등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것 같다.


곧게 뻗지는 못했지만 고꾸라지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