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흥미로운 과거
친밀함, 하마구치 류스케
긴 러닝타임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데에는 단순히 이 영화를 극렬히 보고 싶다는 열망 이상의 다짐이 필요하다. 세시간, 네시간(또는 그 이상)을 조용히 스크린에 눈을 고정시킨 채로 정해진 좌석에서 구속되어 있을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용기를 내는 일이 한 해를 넘길 수록 더 힘들게 느껴진다. 한동안 극장에 갈 일이 없어 몰랐는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초기작들을 극장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았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름은 바로 <친밀함>이었다. 다른 중·단편들 중 일부는 이미 접한 것들도 있었고, 더군다나 쿠폰이 안 먹히는 10,000원의 티켓값은 좀 아깝게 느껴졌다. 물론 미야케 쇼의 <와일드 투어>나 홍상수의 <물안에서> 같은 영화들도 그 가격을 기꺼이 주고 보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보다 짧은 60분 미만의 영화들에 10,000원을 태우는 것이 합리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아무튼 <친밀함> 같은 영화는 나중에 정식 개봉할 가능성도 적어 보이기에 시간을 내서 보러갔다. (결국 보러 가는 김에 며칠에 거쳐 다른 단편들도 보고 감상해버렸다.)
개인적으로 1부 보다는 2부가 더 인상적이었다. 1부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몰입감은 대단했고, 영화 전체로 봐도 이 장면이 제일 좋았지만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레이코가 했던 여러 시도들이 그다지 흥미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물론 레이코의 시도들 속에서 료헤이와의 엇나가는 소통, 그리고 료헤이가 품고 있는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폭력성과 같은 장면들이 1부의 마지막 장면을 더 도드라지게 하는 요소들이긴 했으나 정작 극을 준비하는 배우들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또 타인과 언어(또는 비언어)를 매개로 하여 소통하는 시도들이 되게 수단처럼 소비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1부의 황홀한 새벽 풍경 뒤에 이어지는 2부의 연극은 일단 그냥 순수하게 스토리 자체가 흥미로웠다. 그래서 그냥 계속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서 봤었다. 각본이 생각보다 매콤하기도 했고, 큰 몸짓이 없었음에도 배우들의 감정 표현이 되게 와닿았다. 결국 다 엇나가버린 관계들만 남은 채로 끝나는 엔딩 뒤에 나오는 에필로그는 정말 뭉클했다. 마치 <라라랜드>의 엔딩이랑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극중 시간대랑 비슷한 밤에 극장을 빠져나와 지하철에 올라타니 기분이 묘했다.
<아사코>로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을 처음 접한 이후로 그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작품들이 어떠한 실험 같다는 느낌을 받지 않은 적이 없다. 불가해한 관계, 현실에서 타협될 수 없는 사랑의 구현, 언어와 대화를 매개로 보여주는 역학... 뭐랄까, 그의 영화들은 한 번 더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한 번 보고 나면 기꺼이 내가 다시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주문이라도 거는 게 아닌가 싶게 느껴진다. <친밀함>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초기작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렇지만 초기작을 보고 되려 든 생각은 그의 최근 작품들이 정말 탁월하다는 것, 그리고 그가 계속 스크린으로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초기작들에서의 풋풋함 보다는 최근 작품들에서의 세련됨이 더 좋다.
유운성 평론가가 <아사코> GV에서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마 하마구치 류스케의 초기작을 보고 그가 지금처럼 성공할 거라 예상했다면 평론가가 아니라 점쟁이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