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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일기

엣 더 벤치

벤치워머

by 빠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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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 더 벤치, 오쿠야마 요시유키



최근 일본 영화들을 보면 감독들의 거리의 풍경을 담아내는 능력에 감탄할 때가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등을 연출한 미야케 쇼 감독이 생각난다. 다른 부분들도 훌륭하지만 작품들을 볼 때마다 특정한 장소─특히 특정 시간대의 도시의 모습─를 포착해서 스크린 위에 나타내는 능력이 출중하다고 생각했다. 이 감독 뿐만 아니라 하마구치 류스케도 마찬가지이고, <오버 더 타운>이나 <1986 그여름, 그리고 고등어통조림>, <유랑의 달>, <멋진 세계> 등과 같은 작품들도 떠오른다. 오늘 글감인 <엣 더 벤치> 역시 고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찍었고, 또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공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뭔가 낭만 있는 곳처럼 보여져서 인상적이었다.


다섯 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좋았던 건 두 번째 에피소드였다. 일단 오랜만에 키시이 유키노를 스크린에서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처음 등장했을 때, 키시이 유키노라고 확신했었다가 생각보다 더 러블리하게 나와서 조금 아리까리 하긴 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 뒤에 찾아봤던 <사랑이 뭘까>라는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 때보다 확실히 연기가 더 노련해진 거 같았다. 단순히 키시이 유키노 때문에 이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았던 것은 아니고, 연인 간에 있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초밥에 비유해서 풀어낸 게 자체가 재밌었다. 갑자기 나타나 연인의 이야기를 엿듣다가 슬그머니 조언을 해주는 아저씨를 연기한 아라카와 요시요시 역시 능청스러운 연기로 충분히 감초 역할을 잘 해서 뻔하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되었고, 또 엔딩 역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웃겨서 좋았다. 전체적으로 나름 잘 짜인 에피소드였다.


곧 철거될 벤치를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었음에도 전체적으로 쓸쓸한 분위기가 아니어서 좋았다. 그저 사라져가는 것을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잠시 제쳐두고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벤치와 그 벤치를 달구는 여러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에 집중한 이야기로 구성한 감독의 아이디어가 좋았다고 생각한다. 보면서 마치 벤치가 마지막까지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느낌이 들어 오히려 사람들보다 벤치에 감정이입이 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차이밍량 감독의 <시닝 공공 주택>이 떠오르기도 했다. 곧 사라져 갈 것을 배경으로 찍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시닝 공공 주택에서는 쓸쓸함과 아련한 감정이 더 강하게 들었는데, 아마도 이는 <엣 더 벤치>가 픽션인 데에 비해 사실적인 일상의 모습을 담아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츠에는 '벤치워머'라는 표현이 있다. 상대적으로 주전 선수에 비해 기량이 떨어져 출전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 벤치에 앉아 자리를 지키는 선수를 칭하는 단어이다. 분명히 긍정적인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만약 내가 벤치라면 다양한 벤치워머들이 와주길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궁금해졌다.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오고 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것이 꽤 재밌을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벤치를 뎁혀주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모습만을 볼 수는 없겠지만 삶이라는 게 원래 좋은 면만 보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도 잠시 휴식의 공간이 되어줄 수 있는 데에서 보람을 느끼면 괜찮지 않을까? 벤치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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