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맛이라 좋고, 아는 맛이라 아쉽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지구를 지켜라!>의 리메이크를 만든다고 했을 때, 또 그 영화의 주연이 엠마 스톤과 제시 플레먼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속으로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지구를 지켜라!>는 독창적이면서 오락성까지 놓치지 않은 영화였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독창적인 편이긴 하지만, 재밌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되려 이 감독의 영화는 굉장히 불쾌하다. 영화의 형식적인 면에서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이 감독이 만드는 '기괴하고 신화적인(본인은 이 표현에 절대 동의하지는 않는다)' 스토리가 굉장히 얕은 서사로 구성되어 있다. 별로 독창적이지도 않은 신화적 알레고리를 토대로 한 서사에 절대 가져서는 안되는 '정당성'과 '개연성'과 같은 잣대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그 기괴함을 유지하기 위해 상투적인 설정들을 마구 갖다 붙이면서 전개되는 것이 불쾌하다. 처음 접했던 란티모스 작품인 <송곳니>를 봤을 때를 제외하면 다른 작품들에서는 평단의 평가가 이해되지 않을 만큼 그저 그랬다.
그러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이전 작품인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는 정말 괜찮았다. 사실 <가여운 것들>도 그 전작들에 비해서는 좋았던 편이었다. 슬슬 단순히 기괴한 설정에 치중하는 것을 넘어서 더 견고하고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온(불행하게도 디즈니 플러스로 직행하게 된)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는 어쩌면 그의 영화에서 드러났던 단점 중 하나였던 평면적인 캐릭터들이 보완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 영화 역시 '이건 뭔 소리야?'라고 하는 대목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전작들에 비해 뻔하지 않은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더 나아가 단순히 작품 내부의 인물들을 파괴시키면서 자신이 만든 세계를 견고하게 하려는 방식에서 약간은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아서 긍정적이었다. 이번 작품인 <부고니아> 역시 나쁘지 않았다. 일단 이 영화의 기본적인 설정 자체를 아는 데에서 오는 친근함이 있었다. 란티모스 작품에서 친근하다는 느낌은 처음 받은 것 같다. 친근하기만 하면 그저 원작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에서 오는 지루함으로 가득 찼겠지만 이 영화는 원작의 설정을 2020년대, 그리고 미국이라는 배경으로 적절하게 바꿔 결말까지 가는 데에 있어서 원작을 아는 사람들의 흥미를 놓치지 않기 위한 만반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잘 치환된 설정이라고 한들 원작을 잘 아는, 그리고 그 영화를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 관객이 결말로 향해 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김이 빠지는 걸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생각한다. '뭔가 다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보긴 하지만 사실 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종착역의 모습을 얼추 상상하고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 후반부가 꽤 재밌고,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 훌륭해서 집중하면서 보긴 했지만 아는 맛이 가진 힘이 너무도 강력했다. 다시 곱씹어 봐도 아쉬웠다.
지난 10월 28일에 시사회를 통해 운 좋게 먼저 볼 수 있었다. 시사회 경품을 가끔 나눠주긴 하지만 '꿀'을 나눠주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거의 모든 관객들에게 주는 것 역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개봉을 하루 앞둔 시점에 올내만에 블로그에 글도 쓸 겸 후기를 남긴다. 란티모스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이 영화는 그래도 감독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편하고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인 건 분명한 것 같다. <세계의 주인>이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그리고 <그저 사고였을 뿐>,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좋은 개봉작들이 많았는데 어쩌다보니 글을 작성하는 걸 미루다가 결국 이 작품으로 오랜만에 후기를 남기게 되어 스스로 조금 반성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