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손길'
돌이켜보면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걸 매우 꺼려 왔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로부터 구원 받기 보다는 상처를 더 많이 받았던 게 누적되어 지금의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다. 팬데믹 기간에 손수호 변호사의 <사람이 싫다>라는 책이 나왔고, 나는 그 책이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모르면서 제목만 보고 덥석 구매해버렸다. 다행히 책은 재밌었고, 이 세상에는 참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하는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가져볼까 싶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인간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다.
힘들었던 순간들마다 나를 구원했던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 죽어있는 것들이었다. 책, 영화, 음악... 삶으로부터,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잠시 나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도피처가 되어주었던 것들이다. 희망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나의 삶을 조금이나마 풍요롭게 해주었던 것들에 사랑과 관심을 쏟았다. 그것들은 적어도 나에게 변함 없는 기쁨을 주었을 뿐더러 나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취향이 확고해질수록 이런 것들을 좋아하는 나를 보며 왠지 모를 자신감이 고취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많아지면서 나의 내면에도 타인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오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던 친구와 다시 만나 즐겁게 못 나눴던 이야기를 나누고, 직장에서 새로 만난 동료와 출퇴근길에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등 그런 시간들이 마냥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사람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서 일부러 같이 있는 상황을 피했을 것이다. 분명 사람들에게 상처만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즐거웠던 순간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상처 받은 기억이 더 커진 탓에 스스로를 필요 이상으로 고립시켜왔다.
<구멍>에서 윗층 남자는 마침내 아래층 여자에게 손길을 건넨다. 소외되고 고립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타인의 손길이었다. 따뜻한 손길만이 점점 병들어가는 현대사회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2000년의 메세지는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비록 맘 놓고 사랑하기에 팍팍한 사회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사회를 지탱하는 강력한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도 누군가로부터 구원의 손길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 누군가에게 구원의 손길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