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영화같은
이 영화의 초반을 참 견디기 힘들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연필을 쥔 손이 너무도 거슬렸다. 평소 젓가락질을 특이한 방식으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던 터라 저런 것 따위에 미간이 찌푸려지는 스스로를 보며 좀 놀랐다. 하여튼 사각사각 연필소리와 교차되는 영화 속 영화 장면은 그 거슬림과 별개로 아름다웠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미야케 쇼는 특정 시간대의 특정 장소를 포착해내는 데에 굉장히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가 찍는 풍경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영화 속에서 잔잔한 쾌감을 얻을 수 있다. 짧게 나오는 그 부분은 아름다웠지만 사실 그 내용 측면에서는 큰 감흥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 부분이 영화 속 영화라는 걸 알고 나서야, 그리고 그 뒤로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곱씹어보게 될 뿐이었다. 그래서 영화의 전반부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심은경이 연기한 '리'가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되는 후반부는 정말 영화 같았다. 물론 영화가 맞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전반부에 리가 각본을 썼던 그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이 느껴졌다. 여러 영화들에서 일종의 '체험'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지만 진짜 체험으로서의 관람으로 느껴졌던 적이 많지는 않았는데, 이 영화의 후반부는 정말 어떤 세계로 초대받은 것 같이 느껴졌다. 흡사 예전에 비 간 감독의 <카일리 블루스>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몰입감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면서 겪는 소소한 사건들이 주는 여운이 굉장했다. 그리고 전혀 접점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전반부의 영화 속 영화의 특정 부분이 겹쳐 보였을 때 느껴지는 울림이 꽤나 강렬했다. 올해 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지만, 재밌게 봤던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블록버스터와 같이 시끄러운 사건들이 주는 시청각적 쾌감들이 주를 이뤘던 것 같다. 이 영화는 정확히 그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런 잔잔함. 얼마 전에 봤던 <콘티넨타 25'>와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자신감 없는 인물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가 더욱 와닿았던 건 나도 얼마 전에 도저히 답답함을 못이기고 여행을 다녀왔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서서히 쌓여왔던 스트레스 때문에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즉흥적으로 휴가를 내고 제주도로 떠났다. 앞서 우스갯소리로 연필 잡는 법 얘기를 꺼냈지만, 사실 그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괜히 위축되어 있고, 괜찮다를 연발하는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내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는 정말 마음이 편했다. 그냥 걷다가 마주한 노을이나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만으로도 내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풍요로움이었다.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잠시나마 고된 삶에서 벗어나 환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좋았던 여행이 끝나가면서 아쉬웠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하지만 막상 회사에 복귀하니 여행을 다녀오기 전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정말 짧은 여행이었지만 그곳에서 얻었던 여유가 일상에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리' 역시 분명 그러하지 않을까. 지독했던 writer's block을 깨고 다시 써내려갈 힘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