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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Mar 09. 2019

일, 소비, 휴식*말고

(2) 온전히 삶을 위한 활동

* 여기서 휴식은 버드런트 러셀이 말한 게으름(idle)의 의미가 아닌,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비자발적 휴식을 말한다. 


생존과 관련되지 않은 문제를 고민해볼 수 있을까


인간은 보다 심오한 문제, 즉 ‘경제적 염려라는 압박에서 풀려난 자유를 어떻게 활용할지, 여가를 어떻게 보낼지, 과학과 복리 중 어느 쪽이 자기를 더 지혜롭게 즐겁고 행복하게 할지’와 같은 문제와 마주할 특권이 있다

-케인스


여가의 질이 떨어지는 현상은 일상적 삶을 식민화하려는 폭넓은 경제적 요구가 유발하는 증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정확히 언제, 우리는 경제적 부를 생산하거나 소비하라는 요구로부터 진정으로 풀려나서 세계와 그 문화를 정말로 자유롭게 경험할 수 있을까?

-<일하지 않을 권리> 중에서


의아한 것은 이렇게 일해야만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기꺼이 일을 위해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일이 그토록 고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지만, 일이 다른 취미나 여가활동보다 가치 있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렇게 명백하지 않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우리 삶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에 관하여

노동과 그 재생산을 위한 활동 외의 시간에 우리는 삶을 얼마나 할애하는가? 8살에, 혹은 더 이전에 초등학교 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의 삶을 장악한 '교육 과정'이란 더 좋은 노동자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애초에 초등교육이란 산업혁명 시대에 정시 근무 공장 노동자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만약 교육과정의 목표가 좋은 민주 시민, 행복한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었다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왜?'라고 질문하는 법을 좀 더 열심히 가르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 과정에서 탈락하는 사람은 더 낮은 임금과 열악한 환경의 일자리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았고, 그 과정을 우수하게 해낸 자들에게는 좀 더 값 비싼 월급쟁이가 되기 위한 문이 열렸다. 또한 졸업 후에도, 교과 과정 외의 경험들 또한 기업에 적합한 인재임을 증명하기 위한 사례가 되었다. 우리는 단순히 노동에 투자된 시간 만을 노동에 소요된 시간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노동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력 그 자체의 완성을 위해 투자된 교육 시간을 포함한다면 그 시간은 생각보다 우리의 삶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력이 되기 위한 삶'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생존 : 일 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이에 대해서는 전의 글을 참고하면 좋다. (https://brunch.co.kr/@be-everything/16) 이 사회에서 부의 유일한 재분배 수단은 노동이다. 소위 일프로의 금수저, 자본소득을 가지지 않고서는 뼈 빠지게 일해야 이 생을 유지시킬 수 있다. 


2) 노동의 신성화 

노동의 신성화는 프로테스탄스 윤리에서 시작했지만, 오늘날 '하느님이 원하신다'같은 종교적 설득은 일부 종교인을 제외하고는 효과적인 설득 수단이 될 수 없다. 이에 따라 노동을 신성화시키는 정신적 기제는 사회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17세기에서 18세기 초에는 종교가 일에 헌신하는 삶을 요구했다면, 19세기 초 미국에는 사회 이동성의 약속이 그런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 성실한 노력과 끈기로 자신과 가족을 스스로 더 나은 삶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약속이 일을 향한 공인된 에토스를 뒷받침하는 가장 흔히 통용되는 근거였다. (Rodgers 1978, 10-12 참조) 이런 산업화 시대의 노동윤리는 과거 종교적이었던 에토스의 세속적 버전으로, 내세의 이동성이 아니라 현생의 성취에 초점을 맞춘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또 다른 요소, 현재까지도 존재하지만 산업화 담론에서는 그리 강조되지 않았던 요소가 새로운 탈산업화 시대 노동윤리의 전면에 등장했다. 바로 일을 개인의 자기표현, 자기 계발, 그리고 창조성을 위한 길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노동이 진정으로 그토록 신성하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라면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은 노동을 하기 위해 몸부림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또한 이미 생존이 해결된 상태에서 하는 노동은 우리가 구속되는 의미의 노동이라기보다는 취미에 가까워질 것이다. 

지원동기 : 돈


구직자는 '돈을 벌 수 있는 일들 중에서 그나마 참을 만한' 혹은 '그나마 좋아하는' 일이라서 지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에 그 일이 무급이 되었을 경우에도 계속할 것인지 고민해본다면 이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노동은 '몸을 움직여 활동을 함'에 그 정의가 있지 않다. 노동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한다'는 맥락 속에 정의된다. '돈을 벌기 위해'가 최대의 목표인 만큼, 다른 목표나 가치, 자율성은 무시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의 자율성이란 '네가 다 알아서 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수 없다고 무조건 좋은 일자리가 아니듯이; 하지만 인간의 자율성을 기계적으로 해석한 수많은 오래된 경영 이론들은 직무 순환 등을 통해 노동자의 자율성(?)을 확대할 것을  권장한다.) 진정한 자율성이란 일을 하는 개인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고 그 외의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동시에 자신이 일을 원하지 않을 경우 거부하거나 중단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업무 현장에서 개인의 자율성은 업무에 도움이 되는 한도 내에서만 지원받을 수 있지, 업무 자체의 존재 이유를 묻는 순간 묵살당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에는 강제성이 수반된다. 내가 하는 일에 A, B, C가 있는데 A가 싫다고 거부할 권리가 있는가?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 가치 있다고 믿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노동의 속성은 '고귀함'이나 '신성함'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남의 돈 받기가 쉬운 줄 알았냐'며 어려움을 참고 묵묵히 견디어 내는 노동자의 숭고함을 주입받는다. 


최근 청년들은 이러한 '노동의 숭고함'의 의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진정한 자율의 시간은


아도르노는 노동자가 진정 자율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물으며, 일하지 않는 시간은 암묵적으로 그저 다시 일을 시작할 준비에 들이는 시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 아도르노는 취미라는 개념이 무급 활동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해서 격렬히 반대했다. “나는 취미가 없다. (…) 작곡을 하고, 음악을 듣고, 온전히 집중해서 책을 읽는 이런 활동은 내 삶의 핵심이다. 이것을 취미라 부른다면 그 활동을 조롱하는 것이다.” 

-아도르노, 문화산업, 계몽의 변증법


잘하든 못하든 예술을 하면 영혼이 성장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르세요. 라디오 음악에 맞춰 춤을 추세요. 이야기를 하세요.

-커트 보니것,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나의 모든 흥미가 돈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자신의 관심사 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결코 상품이 되지 않는 나의 관심사가 (혼자 시 쓰기, 만화 그리기 등) 꼭 SNS를 타고 판매되지 않더라도( 수많은 SNS를 통해 취미에서 벌이로 발전한 사례들을 볼 때마다 '나도 저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조급함이 들지라도) 그것이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아니리라. 또한 이러한 우리의 '초연함'은 끊임없이 수많은 성공담들로 인해 위협받는다. 퇴사 후 이모티콘을 그려 10억을 벌었다는 성공담, 취미로 하던 유튜브 방송이 대박 나서 하기 싫은 일을 때려치우고도 돈을 많이 번다는 성공담들 말이다. 이러한 '성공담'은 성공의 기준을 대중을 상대로 한, 상품화에 성공한 관심사 및 취미만을 성공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만큼 우리는 관심사를 돈 되는 상품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것은 환상적이다. 아직도 한 한복 회사의 대표는 일하러 출근하는 것 같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돈을 번다는 인터뷰 내용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생존의 문제와 자아실현이 일체를 이룬, 모든 노동의 미래가 이런 형태로 자리 잡는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성공담의 기준은 상품으로써의 성공이어야만 할까.


이는 먼저 내가 좋아하는 활동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활동은 이전에도 언급했듯, 단순한 '소비활동'과는 구분된다. 감각적 쾌락을 유발하지만 개인의 창의가 반영되지 않는 활동, 지속 가능성과 자급 성이 낮으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기보다는 전문가들의 생산물을 단순히 소비하는 활동과는 구분할 필요성이 있다. (예를 들면 단순히 쇼핑을 통해 스트레스를 푸는 것보다는 명상이나 글쓰기가 좀 더 지속 가능하며 타율성이 낮은 활동, 긍정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에 가깝다.)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상상력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여러 가지를 할 줄 아는 것은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나의 서사를 풍부하게 해 준다.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 우리는 이런 활동의 가치를 너무나 평가절하하고 있다. 당장 10억을 번 작가의 이야기를 보며 조급함이 들 수 있다. 내가 했던 생각을 다른 사람이 발표하고 떼돈을 버는 것을 보며 안달이 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넓게 생각하면, 조급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은 다른 사람의 평가나 자본이 아닌 나 자신의 평가에 기대어야 한다. 상품성과 나의 삶을 분리시키는 연습을 조금씩이라도 상상 속에서 해보는 것은 어떨까. 돈이 안되더라도 내 삶 속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연습 말이다. 여기 새로운 상상을 도울만한 예시들을 가져와봤다.


1) 선물 경제

선물 경제란 과거 시장 경제가 등가의 금액과 상품을 거래하는 방식을 벗어난 거래 방식을 이야기한다. 선물 경제는 당장 내가 창출한 가치가 등가의 금액으로 입금되는 것만을 기대하지 않는다. 많은 디자이너가, 또 개발자가 자신들의 저작물을 당장의 대가 없이 공유한다. (ex. unsplash.com) 우리가 살면서 누려온 상당수는 우리가 그만한 대가를 지급했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다. 자연으로부터, 지구로 부터 대가 없이 누려온 것들, 가족과 친구로부터 주고받아온 마음, 가깝게는 월드와이드 웹을 대가 없이 공개한 사람들이 있기에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그냥 선물과 선물 경제라는 영역의 구분은 먼 길을 돌아 나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혹은 나에게 돌아올 이익을 내포하는가 여부가 될 수 있다. unsplash.com에서 나는 오픈 소스로서 사진을 활용할 수 있는 동시에, 사진을 올리는 작가들은 당장 자신의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오기보다는 자신의 경력을 만들고 자신의 이름과 작품세계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듯이 말이다. 당장의 등가 교환도 좋지만, 완전한 무급의 활동만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다면, 나의 삶의 수많은 활동 중 몇 가지쯤은 시장 경제가 아닌 선물 경제의 영역에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2) 기본 소득

우리는 항상 북유럽의 삶을 우러러본다. 이러한 북유럽의 복지는 '일하지 않는 동안에도 사회적 안정을 누릴 권리'를 포함한다. 즉, 노동 소득이 없더라도 개개인에게 보장된 사회적 안전망이 탄탄하다. 더 이상 기울어진 인력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충분한 양질의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을 때, '일을 하지 않더라도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대안 중 하나는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이란 '가난이라는 조건 없는' 보편 복지의 일환으로서 일을 하던, 하지 않던 국민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소득을 의미한다. 유일한 부의 재분배 수단이 노동인 현실에 치여 돈을 버는 것 외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시대에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는 충분한 논의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모든 이가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삶, 행복하다고 여겨지는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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