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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Mar 04. 2019

우리는 왜 일해야 하는가?

(1) 소비의 덫, 그리고 굴레

생산성은 향상했는데 왜 내 삶은 나아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원시인들이 살이 안 찌는 이유로 우리는 그들은 생존(식생활)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쳐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협동하여 사냥을 며칠씩 나가야 했고, 과일을 먹기 위해서는 나무를 찾아 채집을 해야 했다. 식량을 얻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동력이, 식량으로 얻는 열량에 비해 컸던 것이다. 농경 사회, 산업 사회를 거치며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내는 기술의 생산성은 눈부시게 진보했다. 지금 우리가 과거 사람들이 요하던 만큼의 물품을 지급받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눈부신 생산기술의 진보에 비해, 우리의 삶은 나의 노동에 대한 통제력 측면에서 더 나아지지 않고 있다.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많아졌다.

물론 원시시대의 삶과 비교해본다면, 아니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자급자족을 외치며 숲 속에 들어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을 예시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삶에 '필수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고 있으며, 그 노동을 제공하기 위한 노동자가 되기 위한 필수적 요건에는 <월든>에 나오는 단순한 의, 식, 주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력, 스마트폰, 통신비, 통근거리 내의 집, 통근 수단, 면접을 통과하고 잘리지 않을 정도의 옷차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들어줄 식사, 직장이 만약 도시락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외식비, 병이 걸렸을 때 쉴 수 없으니 병원비 등등) 우리는 생존을 노동력의 제공에 의존하고(-자본 소득자 제외- 다른 말로는, 이 사회의 자본소득을 제외한 유일한 부의 재분배 수단은 노동이며) 이 노동력 제공을 위해 요구되는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이에 더하여 우리를 끊임없이 소비하도록 침투하는 거대한 흐름도 피해 갈 수 없다. 


세상을 돈 없이 살 수 없게 만드는 전략

1) 공유지의 비극 :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이 있다. 아무리 무소유를 실천한다고 한들,  물, 불, 공기, 흙이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물론 물, 불, 공기, 흙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산업적 성장은 그 이면의 대가로서 공기와 물의 오염을 가져왔으며(강은 오염되어 물은 사 마셔야 하며, 공기는 청정기를 돌리거나 마스크를 써야만 들이쉴 수 있는 종류의 것이 되었다.) 도시의 생활방식은 우리에게서 불과 흙을 돈을 주지 않고는 사용할 수 없게 제한하였다. 우리는 과거 무료로 사용하던 것들을 상품으로써 구매하지 않으면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거대한 구조 하에서 이를 통해 누가 수익을 누렸는지, 이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했는지 알기도 어렵다. 


2) 욕구의 생산 (마케팅): 

내가 사는 물건들 중에서 정말 생존에 필요한 물건은 무엇인가. 상품의 유혹은 허무맹랑한 욕구 위에 자리하지 않는다. 다른 이와의 관계, 애정, 자존감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요하는 정서적 필요와 강하게 결합한다. 광고와 마케팅은 이걸 사면 친구들 사이에서 '인싸'가 된다며 광고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며 광고하며,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며 광고한다. 혹은 배제의 위험성 및 생존권에의 위협 마케팅을 통해 '이 상품을 사지 않으면 당신은 건강하지 못할 것이다' 혹은 '이걸 사용하지 않으면 네 건강이 위험하다' 등 누구든 갖고 있는 공포에 결합한다. 


3) 사회적 도태 :
 
모두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스마트폰을 가지지 않는 것은 내가 이 사회에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선발되기 위한 경쟁에서 위협적인 요소이다. 남들이 다 매일 옷을 바꿔 입을 때 깨끗하면 그만이라고 두 벌을 돌려 입는 나의 별명은 단벌신사가 될 것이다. 사회의 일반성(norm)은 개인을 구속한다. 때리거나 감옥에 가두는 식으로 강제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맥락에서 우리는 강요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이 사회에서의 생존권을 인질로 잡고 벌어진다. 스마트폰 없이 살 수는 없지만 직장에서 날 뽑을 때 핸드폰이 없다면 안 뽑을 가능성이 크다. 거지같이 입고 다녀도 되지만 직장에서 그렇게 입고 다니거나 면접 때 그들이 원하는 복장을 갖추지 않는다면 난 채용에서 탈락할 것이다. 혹은 직장을 다니면서 상사로부터 옷을 제대로 입으라는 경고를 받을 수 있다. 사회의 일반성에 요구되는 비용은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달동네를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지음으로서, '깔끔하게 입는'의 요구가 높아짐으로써, 즉, 과거의 더 싼 재화를 비싼 재화로 대체함으로써) 이에 저항하는 것은 나의 생존권의 문제와 직결되어 버린다.


'지갑을 여는 나'와 '일하는 나'는 다른가.

'시발 비용'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노동에서 온 고통을 소비를 통해 풀고자 한다. 하지만 그 소비를 할 돈은 어디서 왔는가? 노동의 현실은 우리에게 초인적인 자제력을 요구한다. 업무를 위한 나의 욕구의 절제와 자제 말이다. 우리는 일하기 싫어도 아침에 일어나야 하며, 타고 싶지 않아도 만원 지하철을 타야 하고, 상사와 고객이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더라도 참아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는 우리가 소비에 있어서는 자제력을 상실하기를 원한다. '다이어트는 포토샵으로', '넌 먹을 때가 제일 예뻐' 이런 문구로 대표되는 광고들 뿐 아니라 상품 자본주의 사회 전체는 우리의 지갑을 열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마케팅을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e9dZQelULDk

우리는 행복을 약속하는 상품들을 소비하며 톱니바퀴처럼 살아간다.

하지만 소비를 할 때 우리는 그 대가를 잊는다. 마치 영상 속 생쥐들이 덫에 걸린 것처럼, 소비를 위한 노동을 지속해나가면서도 소비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노동에의 수고를 오히려 '소비로서' 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노동의 결과가 직접 내 입으로 들어가던 때와는 다르게, 노동의 현장과 소비의 현장은 분리되어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과소비를 불러온다. 


'탕진잼'은 기성 사회가 청년들에게 요구하던 '자제력'에 대한 반발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탕진잼이 무엇의 대가인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집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소액의 돈을 모으기보다는 '소확행'을 위해 투자한다. 하지만 그 소확행의 대가는 어떠했는가? 집을 살 수 없는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 그 결과는 우리의 짧은 감각적 쾌락과 결국은 나아지는 것이 없는 노동현장뿐이 아닌가? 여전히 노동자들은 직장에서는 '존버'(자제력의 발휘)할 것을 요구받으며 동시에 소비에 있어서만 자제력을 잃도록 허가된다.


많은 상품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우리는 인간성에 필요한 조건들이 소비를 통해 채워지리라고 끊임없이 주입된다. 자본주의는 발달한 기술로 노동시간의 절감이 아닌 결핍을 생산하여 상품과 소비, 노동으로 삶을 채워버리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필요 없는 필요를 만들어내고, 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삶을 바친다. "


<일하지 않을 권리> 중에서



이런 생각은 왜 하게 되었나

사실 내 삶의 상품성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내가 수십 가지 일을 하고, 평생 새로운 분야를 탐색하며 공부만 한들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 팔기, 나 자신의 마케팅에 대한 고민이 나를 상품성의 측면에서 평가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노동'에 대해서, 그 노동을 하도록 만드는 환경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소비는 단순한 '자제력의 부재'의 산물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소비를 강제하는 구조, 자제력을 잃도록 장려하는 구조, 사실은 쓸모없지만 쓸모 있을 것처럼 유혹하는 소비의 굴레가 있다. 우리는 다른 사회를 상상해볼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태어난 이상 사람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 깨끗한 물과 공기, 최소한의 식량과 주거가 어렵지 않게 보장되며 노동이 선택이 되고 쓸모없는 물건을 만드는 대신 진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회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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