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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Jan 25. 2019

상품성과 가치

끊임없이 나를 팔아야 하는 사회에서

나를 사주세요.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포장하고, 판매한다.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이고 싶은데, 나를 색색의 포장지로 싸고, 리본을 묶고 과장하여 '스토리 텔링'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은 우리에게 숙명이 되었다. 특히나 돈 말고는 믿을 만한 삶의 보장 수단이 없을 때에는 더더욱. (자본가가 아니고서야) 임금 노동 없이는 삶을 유지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팔만한 셀링 포인트를 찾아 헤맨다. 그 과정에서 미완의 능력, 집중되지 않은 커리어는 제대로 싸지 못한 포장지 사이로 보이는, 흠집 난 사과의 일면일 뿐이다. 점점 더 쌓여가는 거절당한 '자소설'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잃어간다. 


성공적인 삶의 기준: 훌륭한 상품인가?


원래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던 활동이 취업 원서 위에서는 고용 가능성에 유리한 언어로 재구성된다. 노숙인 지원 활동은 자원봉사 분야를 체험한 활동으로 언급되어야 하고, 히치하이킹으로 유럽을 횡단한 경험은 추진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개발한 시간으로 홍보해야 한다.

-일하지 않을 권리, 데이비드 프레인


이전에는 효율성 숭배에 가로막히지 않는 수준에서 가벼운 마음을 유지하며 놀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현대인은 어떤 일이든 무언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우리의 마음속 성공적인 상품화에 대한 뿌리 깊은 신화는 우리를 지배한다. 이는 단순히 기업에서 표면적으로 요구하는 <스펙을 쌓고 봉사 점수를 채우고 토익 점수를 따는> 행위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좀 더 교묘하게 우리를 파괴하는 건 우리의 삶 전체가 상품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녹아 없어져 버리는 현상이다. 살다 보니 취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돈이 되는, 혹은 취업을 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는 소위 말하는 '스펙'을 쌓는 삶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고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기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더욱더 깊숙하게 파고드는 유혹이다. 나는 이런 성찰을 하겠다, 하지만 이것으로 어떻게든 먹고살아야겠지?


나는 이런 상품화의 잣대에 휘둘리는 개인을 비판할 마음은 없다. 나 자신도 오랫동안 자유롭기 어려웠고, 생계를 걱정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들기 마련이므로. 또한 덕업 일치라고 했던가. 내가 행복해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면 참 좋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순수한 개인의 동기를 벗어나 상품화라는 급류에 휩쓸려가는 현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상품화의 조건, 마치 성공담의 조건과 같은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한 가지 전문성 : 수많은 삶의 시도들이, 한 가지 직업 혹은 한 가지 사업 아이템으로 집약

2) 일관성 : 상품성 중 하나는 그 시도가 매번 비슷한 정도로 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리를 잘한다면, 그 요리가 매번 똑같게 일정하게 나와야 식품 사업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지, 매번 다른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소용이 없다. 만화를 그린다고 해보자. 같은 캐릭터를 항상 잘 그려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상품으로써 요구되는 일관성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는 은연중에 갖게 된다. 매번 그림이 달라지면 어때서? 하지만 팔리기 위해서는 상품성을 갖춰야 한다. 

3) 대중성 : 대중의 공감을 사는 콘텐츠여야지, 소수가 공감하거나 내 주변 사람들만 즐거워할 만한 콘텐츠는 돈이 되지 않는다. 개그 능력을 예로 들어보자, 어느 친구는 선생님의 성대모사를 매번 기막히게 해낸다. 그 선생님의 특징도 잘 잡아내고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준다. 하지만 그 친구가 그 개그 능력을 가지고 '돈을 벌어보려면', '돈이 되는 능력으로 승화하려면' 대중이 공감할만한 대상을 찾아 이에 잘 적용을 해야 할 것이다. 소수가 좋아하는 콘텐츠, 주관적인 콘텐츠는 그렇게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되기 쉽다. 또한 만약 기가 막힌 공유 경제 모델을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하지만 이를 대중을 상대로 하기에는 분명, 신뢰에 따른 비용이 발생할 것이고, 수익성 없는 모델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아이디어가 가치 없는 것인가? 다만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능력을 발전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만화를 잘 그리는 친구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웹툰 작가가 되기 위해서만 그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고, 이를 가지고 캐릭터를 만들어 대중이 공감해야만 '가치 있는' 행위가 된다.


'나는 그런 압박을 받은 적 없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각자가 가진 자그마한 재능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한 마디씩 했었는지 떠올려보자.

"나중에 이모티콘을 만들어서 파는 건 어때?"
"너는 하는 게 많으니까 나중에 자소서에 쓸 것은 많겠다."


애초에 대입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책상 앞 12년, 취업을 위한 4+a 년, 그 이후 쓸모 있는 노동자가 되기 위한 40+a 년을 보내는 사회에서 이것은 당연한 몸부림일지 모른다. 




좀 더 다양한 기준으로

다만, 이 때문에 당신이 "쓸모없게" 느껴진다면 좀 더 다양한 척도에서 자신을 돌아봤으면 한다. 대체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삶은 무엇인가? 은연중에 우리는 모로 돌아가도 '금전적 성공'을 성공의 기준으로 세우고 있을지 모른다. 세계 여행을 했다면 그에 걸맞은 사업 아이템을 찾거나 베스트셀러의 작가가 되어 인세를 벌어야 한다. 많은 경험과 봉사를 했다면 이를 통해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내 봉사는 가치를 지닌다. 어떤 인문적 성찰도 결국 그것이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우리는 성공한 성찰로 생각한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방송을 하든 간에 그 유튜브 방송이 잘 팔려서 많은 돈을 벌었다면 성공한 인생으로 다뤄진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금전적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 수는 없다. 좀 더 사회에 권장되는 성공의 척도가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대안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주관적인 삶의 만족도 : 하루하루 얼마나 행복했는가?

-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 주변 사람들과 얼마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 관계에서 위안을 얻는가?

- 죽을 때 얼마나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는가? : 자신이 삶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를 미루지 않고 실행했나.

- 내가 포기하고 있는 것과 희망하는 것의 균형 : 미래를 위해 포기하는 것과 오늘의 행복 간 균형

- 얼마나 다른 이들의 고통을 줄이는 데 동참하고 있는가? : 환경, 인권, 사회 등 다양한 측면에서 다른 이의 고통을 얼마나 줄여주는 삶을 살았는가


우리는 모두 다른 모양의 삶을 산다.


내 친구에게는 요리를 정말 잘하는 재능이 있는데, 사진을 잘 찍는 재능이나 이를 꼼꼼히 기록하는 재능은 없다. 똑같은 맛의 요리를 여러 번 반복해내는 재주도 없다. 하지만 친구는 그 요리로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상품 소비에 덜 의존하는 삶을 사는 데 도움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재능은 상품화에 이르지 않았지만 가치 있는 재능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롭게 다양한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해야 한다. 돈이 못 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들, 다른 가치가 가득한 풍요로운 삶을 포기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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