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명 Aug 20. 2019

자유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기분 내키는대로 하는 게 자유인가?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건만,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더럽혀진 자유의 이름


오늘날 수많은 단체들이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힘 있는 자들은 더 많은 자유를 갈구하며 그들의 투쟁에 자유의 이름을 사용한다. 마치 그들의 주장이 인류 개개인의 자유를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자유는 결코 강자가 약자를 수탈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있지 않으며, 권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도 안 된다. 나는 자유라는 이름이 극소수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궁극적으로 (약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확대하고 보장할 때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방종을 저지르며 자유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 그럴듯하게 갖다 쓰기에 좋은 이름이 자유였던 것이지, 사실상 그들은 자유의 본질과는 상관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자유에 대한 깊은 고민 없는 사회는 곧 이러한 외침에 함락되어 자유를 힘 있는 자들의 방종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나는 자유를 정의할 권위를 가지지 않았다. 다만 자유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점이 간과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자유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보통은 속박의 반대를 떠올린다. 내 행동이 구속받지 않는 것,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과연 여기서 '내 마음대로'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우리는 진정으로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유를 찾는 과정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손들을 헤쳐나가는 과정이다. 자유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자유는 아무 생각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싸워서 얻어야하는 것이다. 자유는 이 세계가 나에게 이렇게 느끼도록 강요한 방식을 간파하고 이를 나의 의지로부터 분리하는 연습이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한다고 믿는 것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손을 식별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심지어 검은 손은 마치 나의 손과 같아서, 이를 가려내려는 시도에 대해 심리적으로 저항하기도 한다.


 가상의 인물을 상상해보자. A는 한 기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매일 같이 가혹한 환경에서 노역을 하고 있다. 그가 창출해내는 이익은 모두 기관의 운영자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그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세뇌를 당하고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노역이며, 노역을 통해 언젠가는(죽은 뒤에)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 노역의 대가는 기관의 운영자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다고. 교육은 성공적이었고, A는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평생 이어지는 대가 없는 노역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믿는 자유는 정말로 자유인가?

우리는 자유를 기분 나쁘지 않음의 동의어처럼 생각한다. 생물로서의 생존 위기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생물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는 자극) 뜨거운 것을 만지거나 살이 찢기면 아프며, 병이 나면 불쾌해진다. 하지만 당신을 착취하기 위한 사회적 구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류의 마음mind이 진화한다면, 아직 우리는 사회경제적 착취에 대한 저항과 방어기제는 습득하지 않은 듯하다. 이에 대한 판단은 세포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 좀 더 고도의 계산이 필요한 것으로 보여진다.) 현대 사회의 착취는, 당신을 기분 좋게 유지시키면서, 혹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며 주면서 당신을 길들인다.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단순히 선택을 하는 데 기분이 더럽지 않으니 '자유롭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는 남들이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간 사람들을 높이 산다. 적어도,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에(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조지아어를 배우라고 강요하는 사회적 구조가 자리잡고 있지는 않다. 근데 조지아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면, 아마도 그건 그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냥 다른 사람과 다른 행동을 해야 주목받고 이로 인해 주어지는 보상이 있는 사회라면 다른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원한 독자적인 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해외여행을 마치 자유로운 활동처럼 생각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다지 독창적인 자유 활동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화는 별 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고를 결정한다. '모은 돈으로 무엇을할까?'라는 고민을 할 때 객관식으로 선택지를 결정지어주는 것이 그 사회의 문화이며 지배적인 사고이다. 여기서 벗어난 답변을 선택했다면, 아무래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봤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 또한 사회 전체에 자리잡게 되면 '남들과는 다른'이라는 구조가 또 다시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줄글로만 길게 쓰면 아무도 읽기 싫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원하고 선택할 때, 몇 가지 관점에서 우리의 선택을 의심해볼 수 있다. 


1. (주체의) 편협성 : 사회 구성원 전부가 아닌 일부만이 그것을 향유하는 것이 좋다고 믿고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사회경제적 약자라면 의심해봐야 한다. 

- 무리한 다이어트와 꾸밈노동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으며(거식증 등 식이장애로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여지는 것 외의 기능은 없다. 그리고 이를 스스로 원한다고 믿고 있는 건 대부분 사회경제적 약자인 여성이다. 사실상 이는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배제와 질책을 통해 강요되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은 스스로가 날씬한 몸매를 원한다고 믿게 된다.

-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사람이 무리한 다이어트로 건강을 망치고 있는가?


2. 이익의 방향성 : 그 활동으로 얻어지는 궁극적인 이득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당신이 그 행위를 선택할 때 최대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 명품이나 고가의 브랜드 상품 소비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없는 살림에 브랜드 외에는 별다른 가치가 없는 상품을 마련하고, 나는 이것으로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고가의 상품을 소비함으로서 가장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당신 스스로인가? 당신은 그 선택을 하는 데 무엇을 대가로 지불했는가? (금전은 매개체일뿐, 당신은 당신의 노동시간을 바쳐서 이를 얻었다.) 당신이 그런 브랜드 상품을 소비한 데에는 그런 상품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거나, 사실상 그 자체로는 별 가치 없는 브랜드이지만(전쟁통이라고 생각해보자) 이를 고급스러운 것으로 느끼도록 하기 위한 마케팅 팀의 공로가 있었다. 노동시간을 상품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도 한 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아주 저렴한 물질을 당신에게 아주 비싸게 팔았다. 이로 인해 이익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3. 매개성 : 타인을 통해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누군가로부터의 인정은 우리를 움직이는 커다란 힘이다. 스스로 그 행위에서 가치를 찾지 못하지만 타인이 바람직하게 생각해서, 다른 사람이 이에 의미를 부여해줄 때만 비로소 가치가 있는 행위는 정말로 내가 원하는 행동이 맞는 것일까? 

- 같은 봉사활동을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야만 하는 봉사와 상대방에게 기쁨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 보람에서 비롯된 봉사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닌 활동이다.

- 당신의 여행이 SNS에 게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치가 반감되거나 사라진다면, 그 여행이 진정으로 본인을 위한 것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의 고민 속에서 대표적으로 밝혀진 검은 손들이 있다. 상품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이다. 이 두가지만 경계하더라도 스스로가 자유라고 믿어왔던 많은 것들을 새롭게 의심해볼 수 있으며, 때때로 이러한 관점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기도 한다. 


아래의 항목은 자유의 포괄적인 의미 하에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 위해성 : 궁극적으로 이는 누군가에게 위해한가? 

지구에 단 한 명의 생물체가 있다면 그는 옳고 그름을 분별할 필요가 없고, 다른 이를 해칠 수도 없으며 스스로 자신의 존속을 끝낸다한들,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가 추구하는 자유와 다른 사람과 살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추구하는 자유는 다른 무게로 논의되어야 한다. 자유라는 이름 안에는 나의 자유도 있지만 타인의 자유도 포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힘의 논리가 지배한 사회에서 위해는 강자에게서 약자로 흐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알량한 권력 하의 방종은 약자를 죽이는 칼이 된다. 폭력은 가깝고 때로 즐거울 수 있지만, 우리는 궁극적으로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휘두르는 칼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다보면 사회의 윤리는 점점 더 붕괴되고 영원한 권력은 없으므로 결국은 당신도 그 칼 끝을 마주하게 된다. 

- 약자 혐오에서만 허용되는 표현의 자유.


선택: 검은 손 틈사이로, 세상을 바라보기


필연적으로 자유는 선택과 결부된다. 선택의 순간만이 우리가 자유를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이다. 당신은 매 순간 선택을 한다. 그리고 선택과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삶은 삭제된다. 물론 우리 삶은 미로 게임과는 달라서, 몇 번이고 되돌려 다시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하지만 매번의 선택때마다 조금씩 틀어져서 마침내는 되돌리기 어렵게 되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순 없다. 누구는 자기 자신이 되었고, 누군가는 되지 않았다고 채점할 능력이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고 고민한다면, 적어도 타인의 의지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다가 느끼는 허무감(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자신이 그것을 원하는지 고민조차 안 해보다가 어느날 추구하던 바를 이루는 데 실패하거나 이룬 뒤에 느끼는 허무감), 죽음을 앞두고서야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니었음을(아마도 미래에 부를 쌓고 현실을 착취하는 목표를 부여받은 경우) 느끼는 삶은 피할 확률이 높아진다. 열심히 직장을 다니지만 왜 사는지 모르겠고 매일매일 다른 사람의 손에 떠밀려 일만하다가 죽는 삶을 살고 싶은가? 너무나 뻔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에 대하여 고민한다면 적어도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조금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더 이상 기계적 중립이라는 논의 하에서 가치들을 논해서는 안 된다. 거대한 사회적 파도 속에서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의 이름 하에 권력의 의지는 나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위장되고, 우리는 영원히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지도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굉장히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고민들이, 글로 써놓고 보면 초라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어쩌다가 이 글을 발견한 누군가에게, 자신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조금의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써보았다. 



작가의 이전글 일, 소비, 휴식*말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