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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Apr 12. 2020

셜록 시즌 4 해석 : 윤리적 부채 청산

셜록 시즌 4가 이전과는 달랐던 이유

* 줄거리 및 결말에 대한 누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미권 시즌제 드라마를 보면서 느낀 건, 후반 시즌에 가서 갑자기 결이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셜록 시즌 4도 마찬가지였는데, 처음 볼 때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일화들이 많았으나 두 번째로 볼 때에는 내가 이때까지의 셜록을 보면서 불편했던 점, 셜록 시리즈가 가진 윤리적 부채에 대한 고해성사와 같이 느껴졌다. 그런 점에서 시즌 4에 대한 내 나름의 해석을 적어볼까 한다.


셜록은 두 남성이 미제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이야기이다. 셜록은 모든 미제사건을 해결하는 천재적 인물로 나오며 감정적인 것에 동요하지 않는 다는 걸 재차 강조한다.(자칭 고성능-고기능- 소시오패스) 여타 흔한 탐정물들처럼 주인공 둘을 제외하고는 뭐 언제 죽거나 사라져도 상관없는 인물들로 소비된다. 나쁜 놈들 잡아 넣는 남성 탐정, 내 생각에 시즌 4는 이러한 윤리적 부채에 대한 청산이다.


1. 숨기 쉬운 자본가


“자 만약 여왕님께서 살인을 원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그 권력과 재력, 깜찍한 정부와 아첨하는 시중들은 물론 온 나라가 나서서

여왕님을 따뜻하게, 살찌게 하잖아요."

여왕님이 하면 살인죄가 아니었을 것이다.

탐정물은 기본적으로 나쁜 놈들을 잡는다. 나쁜 놈들이란 무엇인가. 뒷골목에서 일어난 살인, 강도, 절도 등을 저지르는 작자들이다. 잡고보면 대부분 기소되고, 이들을 체포하는 탐정들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범죄’하면 떠올리는 것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저분하고, 행실이 불량한 작자들이 남을 해치는 일. (실제로 대부분의 흉악범들이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세상을 진짜 망치는 건 뭘까. 놀랍게도 실제로 세상을 망치는 힘있는 자들은 우리가 동경하는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본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 힘을 남용하는 사람들. 거대한 권력을 가진 자들, 그리고 그 권력으로 기존의 부조리(약자를 향한 범죄를 포함하여)를 공고하게 하는 사람들. 실제로 권력의 정점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악영향은 더더욱 맞서기 힘들 뿐 아니라, 정작 그 가해자들은 미움받기보다는 사랑받는 존재들이다. 탐정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잡아 처넣는 것은 쉽다. 하지만 만약 그 가해자가 국가를 운영하는 수준의 재벌이라면? 그의 말대로 사람을 찾아다니며 죽이는 놈이 아닌, 사람들이 제 발로 찾아오도록 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갑작스럽게 보일 수 있는 스미스의 일화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마도 연쇄살인은 어떤 비유로서 장치일 것이다. 힘 있는 자들은 실제로 직접 손에 피를 묻힐 필요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살인, 혹은 그에 버금가는 범죄들을 저지르더라도 처벌을 잘 받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경우들을 수없이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교수, 검찰, 고위 관료들...) 스미스를 통해 셜록은 이를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를 죽이는 힘, 거대한 힘은 사랑받는 모습을 하고 있는 거대한 관성이라고. (근데 스미스 역할을 맡은 배우가 너무 비호감 연기를 잘해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긴 했다.)


우리는 권력자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2. 망각된 여성들

"남자들은 얼굴을 제대로 못 볼 때가 있죠. 

섹시한 미소 뒤에 숨거나, 지팡이를 들거나
혹은 그냥 상담사가 되어서 당신 얘기만 주야장천 들어주면 되는거죠."


"아무리 애써도 못 봐, 안 보이는거지."


왓슨이 한 눈 팔았던 사람
왓슨의 상담사
셜록의 제보자  = 모두 동일 인물 (에우로스)

뛰어난 두 남성의 환상의 콤비로 해결하는 모든 미제 사건!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나는 이러한 주류 콘텐츠들이 유해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기존의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세상엔 여성인 천재가 없는걸까? 실제로도 만약 여성인 천재가 있더라도 대부분 이 사회에서는 사장당했고 저평가 당한다. 많은 여성들은 뛰어난 재능과 성과를 가지게 되더라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고 일단 외모로 먼저 평가 받거나, 그저 '열심히 한다' 정도의 치사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중 문화 분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데, 뛰어난 남성 작곡가, 혹은 작가에게는 아주 쉽게 '천재'라는 칭송이 붙지만, 여성 아티스트나 작가에게는 외모에 대한 평가가 우선하거나 어떻게든 작품에서의 흠결을 찾아내려는 반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사라졌다. 에우로스는 그러한 ‘사라진 여성’을 상징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여성 학자는 탄압받으며, 잘 알려지지 않는다. 에우로스의 등장은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사장되고 숨겨진 여성. 그리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이때까지의 모든 여성 캐릭터들을 상징한다. 여성 캐릭터가 ‘천재’거나, ‘영웅’이거나, ‘싸이코패스’거나, ‘범죄자’인 서사를 우리는 흔하게 만날 수 있는가? 대부분 서사 속 여성은 주인공인 남성의 성적 대상이거나 죽은 피해자거나 엄마 역할을 하거나 셋 중 하나다. 또한 강력한 도덕적 잣대의 노예이다. 바람피는 닥터 지바고는 칭송받지만, 안나 카레리나는 죽어야 한다. 어쨌든 에우로스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뜬금없어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이때까지 셜록에서 보여준 남성중심적 서사에 대한 일종의 고해로서 에우로스가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많은 생각거리를 시사한다. 그런 에우로스가 계속해서 나타났음에도 남성들이 그를 피상적으로 인지하고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에우로스 대사 누가 썼는지.. 어려운 말을 하려는 건 아닌데 기존에 구성된 개념에 대한 해체라는 의미에서 정말 포스트모던함


3. 게임이 아닌 죽음


메리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 계속 하다가 결국 메리를 잃게 만든 셜록

사실 셜록 제작진은 특수요원인 메리를 통해 어느정도 정형화된 여성상에 도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메리도 결국은 왓슨의 아내였으니.. 메리는 그보다는 다른 주제를 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항상 셜록은 타인의 죽음에 무심했다, 아니 무심하다 못해 즐기는 것 같았다. “왜 재미있는 사건이 없는거야! 완전 심심해!”를 외치는데 아니 남 죽는 게 재밌냐고. 사실 셜록에 대한 극찬을 받고 처음 셜록을 봤을 때 뭐 저런 윤리의식 부재한 또라이가 있나 했다. 불쾌해서 재밌지가 않았다. 이후에 줄거리가 궁금해서 보긴 했지만. 어쨌든 제작진도 이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만약 셜록의 가까운 사람, 왓슨의 소중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다면? 가까운 이, 소중한 이의 죽음은 남은 사람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원치 않는 죽음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비극이다. 하지만 결국 그 죽음도 셜록의 곁에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셜록은 크나큰 죄책감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죽음은 게임도 아니고, 즐겁고 흥미로운 ‘사건’도 아니다. 셜록은 시즌 4에서야, 이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둘을 지켜주겠다던 셜록이 결국 메리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 일조해버렸다.


4. 결국은 인간을 지배하는 감정

"주로 직관적인 도덕률에 따라 전략을 세우면 직관에 어긋나는 결과를 낳는 것 같아."

자신을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하도록 조종하라는 미션 (사실 의미없는 감정에 대한 고문)수행

셜록은 자신에게 감정이 없는 것을 마치 자랑처럼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말하는.. 고성능 소시오패스. 이런 오글거리는 워딩은 누가..) 하지만 감정적 판단은 윤리적 판단, 올바른 도덕적 판단의 근간이며, 사회가 유지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감정의 힘을 항상 무시해왔던 셜록에게 에우로스는 ‘감정을 활용한 고문’을 한다. (감정없이 고백하게 만들라는 미션 일화. 안 그러면 죽이겠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데 진짜 보기만 해도 고문) 그리고 셜록은 폭발한다. 감정의 힘을 무시해왔던 사람이지만, 사실 그건 숨기고 있을 뿐, 결국 이는 그의 내면에 항상 있어왔고 그를 파괴시킬 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기억을 왜곡했던 셜록


또한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셜록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위해 자신의 남동생의 죽음을 강아지의 죽음으로 치환해서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물론 궁극적으로 이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기전이다. 감정이 없는 것을 칭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없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토록 감정이 무디다며 자부하던 셜록에게도 결국 감정이란 굉장히 소중한 것임을 일깨운다.)



결국 판단에 수반되는 감정을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윤리학의 고전적인, 그리고 대중적인 문제인 트롤리 문제(트롤리 딜레마라고도 한다.)가 등장한다. 고전적인 트롤리 문제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트롤리 열차를 몰고 가고 있다. 선로에 사람이 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트롤리의 선로를 변경한다면, 다른 사람 하나를 죽이는 대신 기존 선로에 있는 두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뭐 사람 하나를 밀쳐서 트롤리를 막을 수 있다거나, 혹은 선로를 변경하지 않으면 죽는 사람이 내 지인이라던가. 에우로스의 첫 번째 문제는 사실 트롤리 문제의 변형이다. 네 손에 피를 묻혀서 한 사람을 살릴래,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두 사람을 죽일래? 갇혀있는 인간들은 (꼭 그들이 아니라도 인간이라면 아마 마찬가지로 어려워할 것 같다.) 결국 자신의 가책과 감정적, 도덕적 문제의식 속에서 고민하다가 결론적으로 두 사람이 죽는다. 이것도 일종의 감정적 고문. 여기서 계속 우리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며 강조하는데, 하지만 그 이후에도 군인이고 나발이고 망가지는 그들의 정신건강. 그들은 그토록 감정을 경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감정과 직관을 넘어서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그들도 인간이므로. (일관성 측면에서, 소장을 죽였어야 했다는 것이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에우로스는 결과에 상관없이 죽이므로..) 

그리고 에우로스야말로 '감정이 없는' 캐릭터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 없음은 결국 옳고 그름 그 자체가 없다는 주장으로 치닫는다. 도덕성에 대한 해체, 그를 통해 에우로스는 동요없이 남을 조종하고 죽이는 잔인한 살인마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에우로스가 결국 갈구하던 것은 감정적 돌봄이라는 건 결국, 그러한 감정적 도움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 




+추락하는 비행기의 일화의 비유 해석

추락하는 비행기, 그리고 거기 혼자 타고 있는 아이의 비유. 마이크로프트는 이 때 ‘아이는 죽어도 어쩔 수 없으니 도시를 살려야 한다. 바다로 추락시키라’고 한다. 실제 마이크로프트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생각해본다면 그 때 이 아이가 결국 에우로스임을 눈치챌 수 있다.


에우로스의 정신상태를 추락하는 비행기 속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아이로 비유한 게 흥미로웠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지능을 지녔으나 판단력의 기반이 될만한 감정적 능력이 부재한 인물이 세계로의 연착륙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으로 비유한 것 같아서.


(그리고 이쯤되면 마이크로프트, 셜록, 에우로스를 낳으신 분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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