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이야기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임상 심리학 분야에서 ADHD라는 질병을 보며 ‘아 이거 나 아니야?’라는 생각은 어느정도 했었다. 정신 질환이란 없던 특징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스펙트럼처럼 넓게 퍼져있는 특징 중에서 일정 수준을 넘었을 때 질병으로 규정되고, 때문에 그러한 특질 자체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정신과 진단 항목을 보면서 ‘이거 나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러한 공감만으로는 진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아동의 ADHD 증상보다 성인의 ADHD 증상을 봤을 때 나의 이야기 같았고, 여성 ADHD 증상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MMPI 결과에서 이미 강박성과 충동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것만으로 ADHD 진단을 받지는 않았었다. 어쨌든 나는 그래도 정상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일을 잘 해내는 데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절대 질병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저 몇 가지 특징들만 빼면. 하지만 그 특징들이 너무나 성인 여성의 ADHD 증상과 연결되어 적어보았다.
1. 듣는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일 때문에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수집할 일이 꽤 있다. 나는 실제로 상대방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제가 들은 말을 잘 기억을 못 해서 그 내용은 혹시 적어도 될까요?” 나는 강의나 강연을 좋아하지 않는다. 들어도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창 시절엔 강박적으로 필기를 했다. 끊임 없이 받아적으면 그래도 덜 심심하니까. 나중에 읽어보면 되니까. 암기력에 문제가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닌데, 들은 말은 유독 기억이 나지 않았고, 강의를 듣더라도 결국 공부는 스스로 다다시 하는 것에 가까웠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게 그냥 내가 그런 것을 잘 못하나보다, 생각해왔다. 귀로 들은 정보는 나에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았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건 최면 상태로 빠져드는 것과 같았다. 싫은 건 아닌데,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상대에게 관심이 없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참 좋아했다. 상대방 개개인을 아끼는 마음은 분명 있었다. 그냥 듣는 게 힘들 뿐이다.
2. 자극에 대한 끝없는 추구
자극이라 하면 보통 성적이거나 말초적인 자극을 많이 생각한다. 나도 물론 심심하다고 끝없이 먹는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크게 중독된 자극은 정보다. 좋은 게 아닌가? 자랑하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인의 정보 중독의 단점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은 책에 잘 나와있다. 어렸을 때는 그래도 그러한 중독이 책으로 드러났는데, 점점 커가며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24시간 보는 사람이 되어간다. 재밌는 일화는, 끊임 없이 뭔가를 읽는 데 익숙해서 길을 다닐 때 친구가 말이 없거나 하면 길에서 계속 간판을 소리내어 읽더란다. 난 이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친구가 알려줘서 알았다. 무자극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다른 형태로도 드러난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을 안하면, 내가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침묵을 미친듯이 깨고 싶어서 ‘발작하듯이’ 계속 말을 한다. 이건 내가 참여한 녹취록을 풀다가 심각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강박적으로 말을 한다. 그리고 괴로워한다. 자기검열도 심한 편이므로, 내가 언젠가 어디선가 했던 이상한 말을 떠올리며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을 잘 안 만나려고 한다. 내 행적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걸 경계한다.
3. 충동성 (감정조절)
나는 실생활에서 욕을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인데(상대방에게 하진 않고, 혼잣말로), 의식적으로 내가 욕을 할 때 인지하려고 노력해본 결과 보통의 수준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화가 많다, 분노가 많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 사소한 문제에 벌컥 스스로 화를 낸다. 그리고 감정적인 충동을 못 참는데, 보통 그래서 비대면을 선호한다. 텍스트로 내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소통하는 것을 편하게 생각한다. 나름의 사회화랄까(?). SNS는 일부러 안 한다. 내 감정의 파편들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메신저로 가끔 내가 쓴 내용을 스스로 보게 된다. 정말 불같이 화냈다가 다른 내용으로 금세 넘어간다. 넘어가서 또 그 감정에 사로잡히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빠르다. 거의 1분 안에 다섯 가지 정도 주제로 화가 날 수 있는 것 같다. 인내심이나 참을성을 요하는 반복적인 일을 평균 이상으로 힘들어한다. 다이어트를 좋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다이어트를 하루 이상 해본 적이 없다. 나를 숨기거나 무언가를 억제하는 걸 굉장히 힘들어하는데, 그 중에 제일 통제되지 않는 것이 분노라는 감정이다. 하지만 또 감정적인 충동은 금방 꺼지고 의식이 전환되기 때문에, 그러한 분노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고조되지는 않는다.
4. 날아다니는 생각
위에 감정적 충동을 참지 못하고 드러내는 것 생각의 전환속도가 빠른 내용이 잠깐 언급되었다. 나는 스스로의 사주팔자 음양오행이 번개라고 생각했다. 번쩍 하고 한 부분에서 번개가 쳤다가, 그를 미친듯이 수행하고 또 다른 곳에서 번쩍 하고 번개가 친다. 누워있다가도 어떤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이 빠르게 전개되고, 글로 써내거나 당장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가슴이 뛴다. 소개에서도 스스로 밝혔듯, 어떤 생각에 꽂히면 잠이 들 수 없다. 글은 그런 나를 잠재울 수 있는 좋은 치료책이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른 일을 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컴퓨터만큼 성능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가 24시간 과열되어 돌아가는 컴퓨터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산책을 하는데도 계속해서 하는 일과 아까 보았던 빻은 댓글과 거기에 대해서 반박할 근거들에 대해서, 어떤 주제로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수백가지 주제가 끊임없이 무대에 올라오고 퇴장했다. 오히려 그걸 멈추고 싶어서 외부자극 (SNS 구경같은)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가까운 친구는 나와 대화를 할 때 맥락을 설명하지 않고 자꾸 주제가 바뀌는 것을 현재까지도 자주 지적해주고 있다. (고마워..) 문제는 그러느라 학생증은 학교를 다니는동안 10번도 넘게 재발급을 받고, (손에 다른 것을 들고 나갔을 때) 핸드폰을 두고 나가고도 들어올 때까지 모르며, 모든 작은 물건은 내 손에 들어오는 순간 실종됐다.
이 날아다니는 생각의 특징은
(1)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면 빠른 속도로 생각이 전개되면서, 스스로 어지러움을 느낌 (나는 조증일화를 의심했었다)
(2)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빠르게 넘어감
(3) 일 생각과 같이 정신력을 소모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어서 휴식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의미한 정보 자극을 찾아다님. 그냥 누워있으면 끊임 없이 몰려드는 생각으로 휴식을 취하기 어려움.
(4) 뭘 매우 자주 잃어버림, 일상적인 자극을 기억하지 못함 (생각이 한쪽으로 집중되어 있어, 일상을 떠올리려고 하면 안개 속을 걷는 것 같고 저번주만 해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음. 증거를 가지고 하나씩 확인해봐야 안개가 걷히듯 기억남)
5. 심한 강박 및 자기검열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일을 열심히 하고 큰 사고를 치지는 않는(?) 사회인으로 기능하는 배경에는 강박이 있다. 나는 사소한 실수를 정말 많이했다. 나는 수리 영역을 풀 때, 모든 걸 연산 실수로 틀렸다. 이에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었다. 또 감정 통제도 안 되니까 학생 때는 혼자서 울고, 화내고, 시험지도 몰래 찢고 너무 화나서 시험지를 뻘겋게 칠하기도 했다.(그런 감정을 애들한테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은 배웠다.. 최대한 숨겼는데 보이긴 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나는 막판에는 하루에 모의고사를 몇 편씩 풀었다. 연산 실수나 사소한 실수를 줄이려고, 고등학생 때 모든 시험은 오엠알 확인까지 세번씩 검수했다. 수학 검산은 무조건 두 번씩 했다. 뭐든 완벽하게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SNS에 글을 쓰고 내보내기 까지 열 번을 읽으며 수정한다. 일을 할 때에도 글을 수십번씩 읽고 수정하며, 허점이 있을까봐 자꾸 글 속에서 예상 반론에 대한 반박 혹은 해당 내용에 대한 추가 사항을 줄줄줄 썼다.(이는 현재 내가 쓰는 글에서도 드러난다) 친구는 나에게 강박이 심한 편이라 했다. 뭐든지 앞뒤가 전부 맞아야하고, 남들에게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그걸 강요하고. 끊임 없는 자기검열은 내 정체성이 됐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무언가가 ‘틀렸기 때문에’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고, 작은 틀림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넘어가지 못했다. 관계의 핵심이 점점 소통과 교감이 아니라 저 사람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문제 없는 발언을 하는가가 되어갔다. 왜냐하면 그 도덕적 문제의 끝에는 누군가의 생사나 고통이 달려있을테니까,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문제 있을 스스로도 아껴주지 못했고 그렇게 떠나보낸 사람들도 참 많았다. 상대방이 기득권을 옹호하고 일부라도 그 운동을 지지해서,빻은 발언을 한 번 해서, 불의를 보고도 그냥 못 본척 하고 싶어해서. 나도 미워했고 남도 미워했다.
여성이라서
아마 내가 남자아이였다면, 전형적인 감정적 충동, 분노조절장애와 같은 모습을 좀 더 많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맞먹거나 더 강한 힘으로 그를 억누른 자기검열과 강박증은 내가 여성이라서 갖고 있는 특징이라고 확신한다. 여성의 자기검열은 사실 사회로부터 유인한다. 아주 어렸을 적 나는 나대고 까부는 애였다. 하지만 남자애들이 그걸 참 많이 찍어눌렀다. 나대서 밉보이거나 실수하면 욕설과 협박이 돌아왔다. 점점 나대는 성향은 줄어들고, 결국엔 주목받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다. 나이를 조금 먹고 내 주변의 ‘문명화된’ 사회는 여성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SNS에서 남성들에게 물어뜯겼다.(실제로 친구 농담 한 번 받아주거나 (주변 정돈이 안 되었을 당시에) 정치적 주제로 말 한 번 꺼냈더니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남성들이 그렇게 저격글을 썼다.100% 내가 여자여서는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더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고, 나의 반응을 덜 두려워한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웃긴 건 자기도 비슷한 농담이나 같은 논지의 말을 한다는 것. 친한 사람들은 안 그러는데, 오히려 애매하게 아는 남성들이 유독 그랬다.) 더 완벽한 말만, 어떤 허점도 없는 말만 해야했고, 결국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을 많이 억누르게 됐으며, 오래 생각하고 논리적 흠결이 최소화되었다고 생각했을 때만 발언했다. 글을 한 번 올릴 때에도 그에 대한 반박을 수십번씩 생각하고 올리게 됐다. 이는 결국 여성이라는 사회적 지위가 어쨌든 사회에서 좀 더 ‘정상적으로’ ‘잘’ 기능하도록 했다. 약자의 인지적 자원이라 하던가. 동시에 조금 서글프기도 한 나의 정체성이다.
나는 이러한 특질정도로 스스로에게 ADHD 진단을 내릴 권리도 없고 정보도 없다. 또한 이는 단순히 질병상의 특징 뿐 아니라 나의 고유의 유전적 성질이나 경험으로부터 유래된 특질들이 혼합된 결과물일 것이다.
나를 실제로 만나본 사람이라면 뭐야, 아니 생각보다 엄청 잘 지내는데? 생각할 정도로 나는 사회에서 별 문제없이 기능하고 있다. 그래서 질병의 수준은 아니구나 싶었는데 그게 여성ADHD의 특징이라는 얘기에 지금으로서는 어떤 회로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독립서점에 입고된다면 꼭 <여성프렌들리>라는 책을 읽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어쨌든 만약 진단받더라도 크게 극심한 수준도 아닐텐데 정신 질환의 진단이 스스로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만약 그런 것 같더라도 병원 치료보다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치료법을 생각해볼 것이다. 그저, 이것이 만약 내 운명이 아닌 질병이라면 어떤 방법으로든 조금은 치료를 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들고, 내 삶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을 수는 있겠다.